차리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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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인 강이성 여사는 해방 후 서울 마포구 연희동 498번지에서 둘째딸 차영희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1961년 4월 14일 사망 후 효창원 애국선열 묘역에 자리한 차이석묘소에 1961년 4월 18일 합장(1961년 4월 16일 동아일보 부고, 민족문제연구소 2018.11.26. 효창원 수난사는 왜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나? – 효창공원, 결국 애국선열묘역으로 남다. 식민지 비망록 41. 이순우 책임연구원 참조)되었다. 중국에서 본부인 강이성과 부득이 떨어져 지내던 차이석은 31세 과부인 홍매영과의 사이에서 1944년 서자 영조를 낳았다.
 
독립운동가 [[차리석]]의 아내 홍매영, 차영조 모자는 광복 직후 차리석이 사망하고 귀국해 충남 부여에서 힘들게 살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 당시 외무장관이던 [[최덕신]]을 만나 외무부 장관 공관의 부속실에 들어가 생활했다. 독립운동 하던 임정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최덕신은 차영조를 2년제 야간 고등공민학교에 넣어주었고 졸업하자 상업고등학교에 편입시켜주었다. 장관 퇴임 후 사저로 돌아갈 때도 차영조 모자와 함께했다. 최덕신의 어머니뿐 아니라 부인 류미영도 이들 모자를 잘 챙겨주었다. 최덕신이 서독대사로 간 후에도 모자는 최덕신의 자택에서 지냈다. <ref>{{저널 인용
|url=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3201
|제목=“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