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털링 다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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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서리는 [[둔바르 전투]](Battle of Dunbar)에서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쉽게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이제 그의 판단대로 다룰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상대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스털링에 있는 작은 다리는 오직 두 명의 기병들이 나란히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스코틀랜드군은 강 북쪽 연안의 부드럽고 평평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르빈]](irvine)에서 항복한 후에 잉글랜드 군에 가담한 스코틀랜드 기사인 [[리차드리처드 룬디]]경(Sir Richard Lundie)은 6명의 기병들이 동시에 건널 수 있는 [[여울]]을 넘어 기병대를 지휘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왕의 재무업무를 맡고 있던 크레싱햄은 전쟁이 길어져서 생기는 불필요한 지출을 염려하여, 남작에게 이러한 조언을 무시하고, 다리로 곧장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스코틀랜드군은 9월 11일 잉글랜드의 기사들과 보병들이 느린 속도로 다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1296년의 무질서한 스코틀랜드군은 이미 사라져있었고, 월리스와 모레이는 그들의 군대로 하여금 견고한 방어태세를 취하도록 훌륭히 통솔하고 있었다. 많은 수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궁수들이 다리를 건너려고 했으나, 스코틀랜드군이 이들을 막아내고, 또 서리 백작이 늦잠을 자기도 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 궁수들은 본군으로 소환되었다. [[헤임버그 연대기]](Chronicle of Hemingburgh)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의 두 지휘관들은 "적의 대군이 몰려들어와 그들이 스코틀랜드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을 때까지" 기다렸다. 4500명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보병대, 그리고 몇백의 기병대로 구성된 선봉부대가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공격명령이 내려졌다.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높은 지대로부터 빠른 속도록 스털링 다리를 향해 내려왔고, 교두보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탈환했다. 서리남작의 전위대는 본대와 분산된 상태가 되었다. 강의 북부에 있던 중무장 기병대들은 남쪽에 있는 분산된 그들의 동료들을 구하려다가 함정에 걸려 분산되었다. 오직 한명의 기사 요크셔 출신의 서 [[마르마둑 트웽]](Marmaduke Tweng)만이 놀라운 평정심을 보여주며, 무수한 창날들을 돌파하며 전투를 벌여 다리를 돌파해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백여명의 기사들은 살해당했고, 그 중에는 살진 휴 데 크레싱햄도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은 크레싱햄의 가죽을 벗겨내고 몸을 조각내어 승리를 기념하는 상징으로 삼았다. 레너코스트 연대기(The Lanercost Chronicle)는 이때 윌리엄 월리스가<ref>Chronicle of Lanercost, ed. H.Maxwell, vol.1, p.164.</ref>''"뒷발자국 끝에서 잘라낸 크레시암의 가죽 조각의 넓은 부분을 이용하여 칼을 매는데 쓰는 수대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병대의 피해가 컸는데 그 중에서도 [[웨일즈]] 부대의 피해가 더 컸다. 갑옷을 벗을 수 있던 병사들은 간신히 수영을 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