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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8년]] (현종 9) 4월 [[이단하]](李端夏)가 소를 올려 선생의 도학{{·}} 절의를 진술하고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여 [[이조판서]] 및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 [[1669년]] (현종 10) 8월 시호(諡號) '문정(文靖)'이 내려졌다. 「도덕박문을 일러 문(文)이요, 관락영종을 일러 정(靖)이라」 한 것이다.
* [[1796년]] (정조 20) 9월 17일 [[문묘]] 종사(從祀)하였다.<ref> 선정(先正) 문정공은 바로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이다. 이정(二程)·장재(張載)·주자(朱子)를 먼저 공자 사당에 종사하면서 주자(周子)만 홀로 종사하는 반열에서 빠뜨린다면 이정·장재·주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오늘 너희들이 청하는 것은 바로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마음이다. 윤허를 오늘까지 짐짓 미루어 온 뜻은 그 예를 중하게 다루고 그 일에 신중을 기하자는 데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소가 이미 세 번이나 올라온 이상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선정 문정공 김인후를 문선왕(文宣王)의 사당에 배향하자는 너희들의 청을 시행하도록 윤허하는 바이니,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조사한 후 날을 정하여 거행하게 하라.</ref> 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하고, [[불천위|부조]](不祧)를 명하였다.
* [[1796년]] (정조 20) 10월 시호를 '문정(文靖)'에서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以正服人)을 정(正)이라」 이른다 하였다.
 
이후 [[1786년]] (정조 10) 8월 팔도 유생 ‘박영원’(朴盈源)등, 10월 팔도 유생 ‘정헌’(鄭櫶)등, [[1789년]] (정조 13) 4월 팔도 유생 ‘심익현’(沈翼賢) 등, 8월 팔도 유생 ‘신광례’(申光禮) 등, [[1790년]] (정조 14) 3월 팔도 유생 ‘이악겸’(李岳謙)등, [[1796년]] (정조 20) 6월 팔도 유생 ‘이명채’(李明彩)등, 방외(方外) 유생 ‘김무순’(金懋淳)등, 가을 7월 경기・호서・호남 삼도의 유생 ‘이종호’(李種祜)등, 팔도 유생 ‘채홍신’(蔡弘臣)등, 8월 경외(京外) 유생 ‘정대현’(鄭大賢)등・경외(京外) 유생 ‘이규남’(李奎南)등, 9월 관학 유생 ‘심내영’(沈來永)등・관학 유생 ‘이광헌’(李光憲)등이 [[문묘]] 종사를 소청(疏請)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1796년]] (정조 20) 9월 17일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문묘]] 종사를 청하자, [[조선 정조|정조대왕]]은 선정신 [[김인후]]는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요, 도학 연원의 정통으로 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다며 윤허하였다.<ref> 선정(先正) 문정공은 바로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이다. 이정(二程)·장재(張載)·주자(朱子)를 먼저 공자 사당에 종사하면서 주자(周子)만 홀로 종사하는 반열에서 빠뜨린다면 이정·장재·주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오늘 너희들이 청하는 것은 바로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마음이다. 윤허를 오늘까지 짐짓 미루어 온 뜻은 그 예를 중하게 다루고 그 일에 신중을 기하자는 데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소가 이미 세 번이나 올라온 이상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선정 문정공 김인후를 문선왕(文宣王)의 사당에 배향하자는 너희들의 청을 시행하도록 윤허하는 바이니,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조사한 후 날을 정하여 거행하게 하라.</ref> 그해 11월 8일 예관을 보내어 문선왕묘(文宣王廟)에 술잔을 올린 후, [[문묘]] 종사 의식을 행하고 교서를 선포하였다.<ref>경은 해동의 염계(濂溪)이자 호남(湖南)의 공자이다. 성명(性命)과 음양(陰陽)에 관한 깊은 식견은 아득히 태극도(太極圖)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고,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요지는 먼저 《소학》에 힘을 쏟는 것이었다. 시를 지어 뜻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는 천지 사이에서 두 사람만을 추대하였고, 이치를 연구하고 근원을 탐색하여 일찍이 《역상편(易象篇)》을 저술하였는데 여러 학설들이 탁월하였다. 홀로 대의(大意)를 보아 추구해 나감에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으니, 도(道)와 기(氣)가 하나로 섞여 있다고 주장한 여러 학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단연코 내쳤고, 이(理)와 기(氣)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변론은 동지들의 의심을 후련하게 풀어 주었다. 내면에 쌓인 강건하고 곧고 단정한 성품은 엄동 설한의 송백(松栢)이었고, 밖으로 드러난 빛나고 온화하고 순수한 자태는 맑은 물위의 연꽃이었다.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다행히 크게 해보고자 하던 효릉(孝陵) 시대를 만나 순수한 유신(儒臣)이 내면에 지닌 아름다운 덕을 펼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동궁이 깊이 신임하여 이미 그림에다 뜻을 담아서 주었고, 숙직하는 관서로 찾아와서 강론하는 이외에 특별히 마음을 털어놓곤 했었다. 보필하는 신하로서 은연중에 마음이 부합한 것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은 것과도 같았고, 임금과 백성들에 관한 책임을 스스로 맡고 나선 것은 이윤(伊尹)이 성탕(成湯)을 만난 것과도 같았다....</ref>
[[1796년]] (정조 20) 9월 17일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문묘]] 종사를 청하자, [[조선 정조|정조대왕]]은 선정신 [[김인후]]는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요, 도학 연원의 정통으로 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다며 윤허하였다. 그해 11월 8일 예관을 보내어 문선왕묘(文宣王廟)에 술잔을 올린 후, [[문묘]] 종사 의식을 행하고 교서를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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