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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독일 연방공화국|1949년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의 분단 정부|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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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 또는 독일 연방공화국(獨逸 聯邦共和國, {{llang|de|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줄여서 도이칠란트 또는 '''독일'''({{llang|de|Deutschland|도이칠란트}}, {{소리|De-Deutschland.ogg|듣기}}, {{llang|en|Federal Republic of Germany}}, {{문화어|도이췰란드}})은 [[중앙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독일 영토는 357,021 [[제곱킬로미터]]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1년]] 기준 80,219,695명으로<ref>[http://epp.eurostat.ec.europa.eu/cache/ITY_OFFPUB/KS-QA-09-047/EN/KS-QA-09-047-EN.PDF First demographic estimates for 2009], [[유럽 통계국]].</ref> [[유럽 연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이민자 인구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ref>{{웹 인용|title=Germany Top Migration Land After U.S. in New OECD Ranking|url=http://www.bloomberg.com/news/2014-05-20/immigration-boom-propels-germany-past-u-k-in-new-oecd-ranking.html|publisher=Bloomberg|date=20 May 2014|accessdate=29 August 2014}}</ref>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주요 도시는 [[베를린]]([[수도]]), [[뮌헨]],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이 있다. [[고대]]에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100년]] 이전에 [[게르마니아 (책)|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10세기]]부터 [[게르만족]]의 땅은 [[1806년]]까지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16세기]]에 북독일은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개혁]](Reformation)의 핵심부로 자리 잡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독일은 최초로 [[독일의 통일|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9년]]에 독일은 연합군 점령지 경계선을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으나, [[1990년]]에 [[독일의 재통일|통일]]되었다. 독일은 [[연방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공화국]]으로 [[독일의 주|16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이 나라는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G8]],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세계 무역 기구]],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다. 독일은 오늘날 [[유럽]] 최강대국으로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며,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는 세계 5위이다. 수출과 수입 규모는 세계 2위이다. 연간 [[정부 개발 원조|개발 원조액]]은 세계 2위이며,<ref>[http://www.topnews.in/germany-worlds-second-biggest-aid-donor-after-us-229970 Germany world's second biggest aid donor after US] TopNews, India. Retrieved 2008-04-10.</ref> 군비 지출액은 6위를 보인다.<ref>[http://www.sipri.org/contents/milap/milex/mex_major_spenders.pdf/download The fifteen major spenders in 2006], [http://web.archive.org/web/20070814224502/http://www.sipri.org/contents/milap/milex/mex_major_spenders.pdf/download Archive Page], 2007, PDF, Recent trends in military expenditure,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ref> <!-- 관련 순위 목록 페이지 연결 필요 --> 독일은
== 국명 ==
{{본문|독일의 국명}}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헌법상이나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독일어|자국어]] 표기는 '''도이칠란트'''({{lang|de|Deutschland}})이지만, [[영어]]로는 '저머니'({{lang|en|Germany}})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알마뉴'({{lang|fr|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lang|pl|Niemcy}}), [[중국어]]로는 '더궈'({{lang|zh|德国}})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llang|ja|独逸}})<ref>현재 일본에서는 한자 음역은 쓰이지 않고 가타카나로만 '도이쓰'로 표기한다.</ref>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 }}</ref><ref>단, 도이칠란트는 현재까지 독일과 함께 이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의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ref>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본문|도이치 (어원)}}
독일어의 "deutsch"의 어원적인 전형태들은 본래 "종족에 속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우선은 대륙성 [[서게르만어군]]의 [[방언 연속체]]를 지칭하였다. 도이칠란트라는 명칭은 15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개별문서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그 이전에는 "deutsch"라는 수식어가 "Land(땅, 나라)"와 조합되어 사용된 예만 확인되었다. 가령 부정관사와 단수형태의 "ein deutsches Land" 또는 정관사와 복수형태의 "die deutschen Länder"처럼 쓰였지만 정관사의 단수형태인 "das deutsche Land"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 역사 ==
{{본문|독일의 역사}}
{{본문|게르만족|게르마니아}}
[[파일:Gehrts Armin verabschiedet sich von Thusnelda 1884.jpg|섬네일|왼쪽|150px|아르미니우스]]
[[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가장 늦게 자리 잡아 [[청동기 시대|로마 이전 청동기 시대]]에 처음 문명이 발생 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에 게르만족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유럽]]의 [[이란인]], [[발트족]], [[슬라브족]]을 비롯하여 [[갈리아]]의 [[켈트족]]과 만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들과 접촉한 [[로마 제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어원학|어원론]]이나 [[고고학]]상의 발굴을 통해서도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이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은 대체로 [[라인강]]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영토를 이렇게 불렀다)를 침략하였는데, 이 시기에 게르만족은 부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로마식 전술에도 익숙해졌다. 서기 [[9년]]에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에게 전멸당하였다. 이로써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늘날의 독일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지 않았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 (책)|게르마니아]]》를 쓴 [[100년]]경에 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선]]을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되었다.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로마 제국 국경]]와 도나우강 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내로 들어왔다.
=== 신성 로마 제국 (962년 ~ 1814년) ===
{{본문|신성 로마 제국}}
{{참고|동방 식민지}}
[[800년]] [[12월 25일]]에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으나,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나라는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인 [[동프랑크 왕국]]이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1806년]]까지 존속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북쪽의 [[아이더 강]]에서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이르렀다.
[[오토 왕가]]의 치세([[919년]] ~ [[1024년]])에 [[로타링기아 공국]], [[작센 공국]], [[프랑켄|프랑켄 공국]], [[슈바벤|슈바벤 공국]], [[튀링엔|튀링엔 공국]], [[바이에른|바이에른 공국]]이 합방하였으며, [[962년]]에 독일 왕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 ~ [[112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에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 (1315년 ~ 1317년)|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파일:Martin Luther, 1529.jpg|섬네일|위오른쪽|왼쪽|마르틴 루터]]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 (1356년)|금인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였다.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 파문, 보름스 국회 심문, 농민전쟁, 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한 인문주의와의 결별 등을 거쳐 분리된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 반동과 혁명 (1815년 ~ 1870년) ===
{{본문|독일 연방}}
[[파일:Maerz1848 berlin.jpg|오른쪽|200픽셀|섬네일|1848년 3월 19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 봉기]]
[[파일:Deutscher Bund.svg|섬네일|250px| [[독일 연방]] 1815–1866.]]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1815년]]에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39개 주권국의 느슨한 연맹체인 [[독일 연방]]이 성립하였다. [[왕정 복고]]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통합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발흥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은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경제 통합을 크게 진전시켰다. 이 시기에 여러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경도되었으며 [[민족주의]]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당초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 [[독일의 국기|독일 국기]]의 색이 된다.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하고 헌법을 제한하여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 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무찔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
{{본문|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
[[파일:LenbachFürstBismarck1895.jpg|섬네일|오른쪽|150px|비스마르크]]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사상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 제국 전체의 황제를 겸임했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 ([[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중 삼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영국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 (1884년)|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토골란드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사건|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에 패배하였다.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ref>[http://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0,1518,530319,00.html Last German World War I Veteran Believed to Have Died]. Spiegel Online. January 22, 2008.</ref>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되었다. 그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 (제1차 세계 대전)|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독일은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되었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1933년) ===
{{본문|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11월 혁명|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 사회주의 공화국|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의 대통령|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파일:Stab-in-the-back postcard.jpg|섬네일|오른쪽|"[[등 뒤의 칼 찌르기]]"]]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루터교, 국가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 나치 독일 (1933년 ~ 1945년) ===
{{본문|나치 독일}}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의회 방화에 대한 법령|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국제 연맹)|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파일:Hitler as young man.jpg|섬네일|왼쪽|150px|히틀러]]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전격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진주만 공격|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이탈리아 전역 (제2차 세계 대전)|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ref>Steinberg, Heinz Günter. ''Die Bevölkerungsentwicklung in Deutschland im Zweiten Weltkrieg : mit einem Überblick über die Entwicklung von 1945 bis 1990.'' Bonn 1991. Also see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_casualties#endnote_Germany1 World War II casualties]</ref>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ref>Niewyk, Donald L. and Nicosia, Francis R. ''[http://books.google.ca/books?id=lpDTIUklB2MC&pg=PP1&dq=Niewyk,+Donald+L.+The+Columbia+Guide+to+the+Holocaust&sig=4igufxQHRCNrkjwRuMt1if_mf5M#PPA45,M1 The Columbia Guide to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pp. 45-52.</ref>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ref>"[http://news.bbc.co.uk/2/hi/europe/4530565.stm Leaders mourn Soviet wartime dead]". BBC News. May 9, 2005.</ref>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 분단과 재통일 (1945년 ~ 1990년) ===
{{참고|연합군의 독일 점령 지역|서독|동독|독일의 재통일}}
[[파일:Besatzungszonen ohne text.gif|섬네일|위오른쪽|[[1945년]]의 분할 점령된 독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독일은 [[오데르-나이세선]] 동쪽 영토를 잃고 옛 동부 영토와 다른 지역에서 독일인 1,500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독일 여성 2백만 명 이상이 강간당하고, 여러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다. 남은 영토와 [[베를린]]은 [[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이 4개 군사 점령 지구로 분할하였다.
[[1949년]] [[5월 23일]]에 독일 영토 가운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방측 지구가 통합하여 [[서독|독일 연방공화국]]이 들어섰으며, 같은 해 [[10월 7일]]에 소련측 지구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두 나라를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칭하였으며, 베를린 역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독의 경우는 [[본]]이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두 나라로 갈라진 당시 상태가 언젠가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므로 수도 본의 지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서독은 "[[사회 시장 경제]]" 체제와 더불어 연방제 의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서독은 장기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57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에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동독은 [[동구권]]에 속한 나라로 [[바르샤바 조약]]과 붉은 군대 점령군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받았다. 동독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권력은 공산주의 세력인 [[독일 통일사회당]](SED)의 [[정치국|정치국원]]들이 독점하였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비밀 정보 기관인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와 그 밖의 여러 통일사회당 하부 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대신 국가는 싼 값에 대중의 기초 생활 필수 재화를 제공하였다. 동독은 소련식 [[계획 경제]] 체제를 세웠으나 나중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의 사회 보장 제도의 이익과 더불어 서독이 언제든 침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을 선전하였으나, 동독 시민 다수는 서방의 정치 자유와 경제 번영을 부러워하였다. 동독인이 서독으로 월경하지 못하게끔 막고자 [[1961년]]에 건설한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파일:Bundesarchiv Bild 183-Z1212-049, Döllnsee, Erich Honecker und Helmut Schmidt.jpg|섬네일|250px|[[1981년]] 될른제에서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를 만난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1970년대]] 초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서독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 정책에는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영토를 잃은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반진출한 바도 있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3일]]에 국경을 개방하자 [[9월 11일]]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 사건이 동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월요일 시위 (동독)|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당국은 11월에 뜻밖에도 국경 제한을 해제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을 다녀갔다. 당초 동독은 자신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게끔 통제 정도만 조절하기 위한 의도로 국경 개방 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이 일로 말미암아 동독에서 [[벤데 개혁]]이 가속화되었으나 결국 1년 뒤인 [[1990년]] [[9월 12일]]에 [[2+4 조약]]으로 귀결되어 전후 당시 독일을 점령하던 4개국은 항복 문서에 따른 자신들의 권리를 폐기하고 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의 재통일|독일은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동독에서 새로이 편성된 다섯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귀속되었다.
=== 베를린의 수도 인정과 유럽 연합 통합 (1990년 ~ ) ===
[[1994년]] [[3월 10일]]에 의회에서 가결한 본-베를린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본은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부 연방 부서가 이 곳에 남았다. 정부 기관 재배치는 [[1999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물가, [[실업]] 증가, [[시장경제]] 환경으로 인하여 옛 동독 사람들의 부적응과 같은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재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독일은 [[발칸 반도]]에 평화 유지군을 파병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일원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현재)|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러한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전후 독일은 국내법에 따라 국방 기능을 위해서만 군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외 파병은 이러한 국방 제한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 사안에 관하여 의회에서는 표결을 통해 평화 유지를 위한 참전을 합법화하였다.
== 자연 환경 ==
=== 지리 ===
{{본문|독일의 지리}}
[[파일:Deutschland topo.jpg|섬네일|위오른쪽|오른쪽|독일의 고도 분포]]
독일의 면적은 357,021km<sup>2</sup>로, 이 가운데 육지 면적은 349,223km<sup>2</sup>, 내수면 면적은 7,798km<sup>2</sup>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7번째로, 세계에서는 63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국토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여 9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북해]] 및 [[발트해]]와 맞닿아있다. 지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차츰 낮아지며, 알프스 지대·중앙 구릉 지대·북부 독일평야의 4대 자연 구역으로 나뉜다. 그리하여 [[도나우강]] 외에 큰 강은 북해와 발트해로 흘러든다. 주요 하천으로는 독일의 산업 중심지를 흐르는 [[라인강]], [[베저강]], [[엘베강]]과 폴란드와의 국경을 이루는 [[오데르강]]이 있다. 알프스산맥에서 독일 영토에 속하는 곳은 거의 산맥 북사면에 한정되고, 표고도 최고 3000m가 못 된다. 독일의 최고봉인 [[추크슈피체산]]은 높이가 2,963m이다. 알프스 전지는 빙하의 퇴적물로 덮여 있다. 중앙 구릉 지대는 복잡한 지질구조를 가진 지괴 산지와 분지로 이루어지고, 동쪽의 [[에르츠산맥]]과 서쪽의 라인 고지 사이에 하르츠 산지·튀링엔 숲 등의 소지괴가 있다. 북부 독일 평야는 과거 빙하로 덮여 있어서 그 퇴적물이 남아 있고, 이탄지와 소택지도 많다.
=== 기후 ===
북서부 지역은 해양성 기후, 남동부는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전반적으로 겨울은 한랭하며, 여름은 온화하나 변덕스러운 날씨를 보인다. 봄이 대체로 늦게 오므로 여름이 짧은 편이다. 7월의 평균 기온은 해안 평야에서 16℃, 남부 고지에서 17℃, 라인 하곡에서는 19℃가 넘는다. 12월부터 3월까지의 겨울은 라인강이 얼 정도로 추위가 혹독하다. 청명한 날씨는 해안 지역은 4-5월, 내륙 지역은 6-9월에 볼 수 있다. 6월까지는 샤프트케르테라 불리는 추운 날이 종종 급습하며, 연중 갑자기 비오는 날이 많다. 여름에는 가장 더운 달의 기온이 북부의 경우 17-18℃, 남부는 25℃로 서늘한 편이다. 1월은 -3℃에서 2℃사이에 있고, 연간 4개월 이상은 10℃이상이다.
== 정치 ==
독일 연방공화국은 16개의 주가 각자 헌법·정부·재판소를 두는 연방 국가로서, 국가 원수는 [[독일의 대통령|대통령]]이다 그리고 행정부의 수반은 [[독일의 총리|총리]]이다. 따라서 연방수상이 내각의 실권을 장악하고있다. 총리는 [[독일 연방 의회|연방 의회]]의 과반수를 얻은 자로서, 임기는 4년이다. 입법 기관은 연방 상원과 연방 하원로 이루어진 [[양원제]]로서 상원은 연방 의회의 의결에 대한 거부권이 없다. 연방 의회 의원은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를 병용한 직접 선거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현 연방 의회 의원 수는 672명(지역구 배정 초과 의석 때문에 매 총선거마다 총수는 달라진다)이다. 한편 연방 상원은 각 주와 특별시에서 인구 비례에 따라 임명된 대표로 구성되며, 주 정부는 연방 상원을 통하여 연방의 입법과 행정 업무에 참여한다. 입법권은 연방 의회와 연방 상원 모두에 있으나 실질적 권한은 연방 의회에 있다. 정당으로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DU)과 그 자매당인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SU),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자유민주당]](FDP) 등의 기성 정당이 있으며, 1980년대 서독에서 등장하여 기성 정당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준 [[독일 녹색당]], 동독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독일 민주사회당]](PDS), 1990년 구 동독지역 진보 세력이 창당한 [[동맹 90]] 등이 있다.
[[1982년]] 10월에 중도 자민당의 내각 사퇴로 슈미트 정권이 붕괴하고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 보수 연립 정권이 들어섰다. [[1994년]] 10월 총선 결과 콜 총리의 집권 여당이 승리하여 제5차 콜 정권이 탄생하였다. 독일은 통일 후 중부 유럽 국가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이들의 대서방 관계설정에 선도적 역할을 자처하는 한편 세계 무대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꾀하고 있다. [[1998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함으로써 슈뢰더 사민당 당수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고 2002년 재취임했다. [[2005년]] 총선이후 기민련의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로 취임하였다.
=== 독일의 주요 정당 ===
[[독일 연방하원]] [[2017년]]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원 총선거 의석수 순서대로 정렬했다.
*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CDU/CSU. 246석. [[기독교민주주의]], [[자유보수주의]] 정당. 현재 여당)
* [[독일 사회민주당]](SPD. 153석. [[사회민주주의]] 정당. 현재 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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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 90/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 67석. [[환경주의]], [[다원주의]] 정당. 현재 지지율 2위)
* [[파란당]](Blau. 2석. [[민족보수주의]] 정당. AfD의 우경화에 반발한 의원 두명에 의해 창당)
연방 하원엔 진출하진 못하였으나 주의회, 유럽 의회에 진출한 주요 군소정당은 이렇다.
* [[독일 국민민주당]](NPD. [[신나치주의]] 극우 정당.)
* [[당 (독일)|당]](Die PARTEI. 장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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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동독과의 외교관계가 끊겼으나 [[2001년]] [[3월 1일]]에 다시 수교하였다.
; 일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의 적대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추축국으로서 연합국과 맞서 싸웠다. 대전 후, 양국은 잿더미에서 기적적인 부흥을 이뤄낸 경제대국이고, 중요한 파트너로서 일본에 있어 독일은 [[영국]], [[프랑스]]를 앞지르고 유럽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독일은 일본과 함께 [[상임이사국]]을 노리는 [[G4 국가]]의 파트너로서 행동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독일은 정치적 성향이 일치하고 있다.
; [[러시아의 대외 관계|러시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양국은 [[폴란드]] 등을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ref>상세한 것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참조.</ref>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과 중앙유럽을 침공하였다. 이 때부터 [[1944년]]까지 소련이 점령하던 지역은 독일의 [[오스틀란트]](Ostland)의 일부가 되었다.([[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제외) 그 후 소련은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일련의 전투를 치르며 독일을 서쪽으로 밀어냈다.<ref>상세한 것은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을 참조.</ref>
; 폴란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때까지 악화되었다. 하지만 나치가 패망한 이후 서서히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군에 점령당하여 [[동맹국]]에 항복을 한 바가 있었다([[부쿠레슈티 조약 (1918년)|부쿠레슈티 강화 조약]]).
; 프랑스
[[프랑스 혁명]](1789년)으로 [[알자스]] 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영향을 받게 되자 프랑스와 독일군주들간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 김용구 |제목 = 세계외교사 |연도 = 1989 |판=1995(上•下 合本)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부 | id={{ISBN|89-7096-413-4}}|쪽= 2 |인용문 =프랑스혁명은 결국 프랑스의 순수한 국내문제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알사스지방에 독일군주들이 갖고 있던 소유권이 혁명으로 영향을 받게 되자 독일군주들과의 긴장관계가 야기되었다.}}</ref>
; 헝가리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부근에서 일어난 레흐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재위: 936년 - 973년)의 군대에 패해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는 최소한 서부 유럽에 있어서는 일시적으로 약탈을 중단하고, 보다 평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오토 3세]](재위: 991년 - 1002년)는 헝가리의 그란(현재의 [[에스테르곰]])에 주교 통치 지역을 건설하여 [[이슈트반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1000년)<ref name="박래식">박래식 저, 《이야기 독일사: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청아출판사(2006) {{ISBN|89-368-0354-9}}</ref>{{참고 쪽|53}}하고,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가톨릭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미클로시 호르티]]의 헝가리는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호르티는 수정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ref name="조르주">조르주 뒤비 지음, 채인택 옮김, 《지도로 보는 세계사》, 생각의 나무 (2006)</ref>{{참고 쪽|200}} 이리하여 헝가리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하여 호르티를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합작자로 대체해야 했다.
;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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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마르 공화국]]
* [[독일 민주 공화국]]
* [[독일인들 (다큐멘터리)]]([[:en:Die Deutschen]])
* [[독일의 과학기술]]([[:en:Science and technology in Germany]])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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