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춘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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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환공 재위 7년(기원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다.
 
===''' 사망''' ===
제환공 재위 41년 ([[기원전 645년]])에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물었다.
 
*"뭇 신하들 가운데 재상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 관중이 말했다."임금보다 더 신하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 환공이 물었다. "역아(易牙)는 어떤가?" "제 자식을 죽여 임금에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개방(開方)은 어떤가?" "부모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수도(豎刀)는 어떤가?" "제 생식기를 갈라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친애하기 어렵습니다." 관중이 죽고 나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중용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정권을 전횡하게 되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사전 사기 제태공세가 권32</ref>'''
 
관중이 죽자 제환공은 예전의 명석한 군주가 아니었다.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아 사후 5명의 공자가 군주 계승권을 놓고 싸웠으며, 이 때문에 제환공의 시체는 67일간이나 방치되었고, 구더기가 우굴거려 문밖으로 팽개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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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의 도움으로 제환공 재위 43년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2년]]) 제나라는 북쪽으로 하북성 북부, 서로는 태행산맥, 남은 하남성 중앙부 근처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 철학''' ==
 
관중의 사상은 [[사기]](史記) 관안열전과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가 했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엄연히 말하자면 온전히 그가 작성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 유물론적 사상''' ====
 
관중의 사상은 기초적인 유물론적 개념을 갖고있다. [[관자]](목민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날의 생활이 즐거워지면 자연히 예의를 분별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만 하면 도덕의식은 저절로 높아진다." 또 (칠법편)에서 "물질이 풍부하기가 천하에서 제일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천하를 이끌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ref><신역 관자>/ 이상옥. 1985. 서울 : 명문당</ref> 이는 물질적 기초가 뒷받침이 되어야 사람의 정신,의식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 목민(牧民)''' ====
 
관중은 유물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이른바 목민이다. 백성을 기른다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 바로 관중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의 목민도 관중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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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발적 복종의 논리 ====
 
* "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보배다."<ref>사기 관안열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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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 사후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계속 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전통적인 강국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 훗날 등장하는 도가는 물론 제자백가에 영향을 주었다.
 
* [[논어]] 헌문편에서 [[공자]]는 관중의 사람됨이 인(仁)하지 못하다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관중이 아니었다면, 오랑캐로부터 주나라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관중의 존왕양이의 과정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화하족의 문명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관중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의 평을 내렸다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