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 거서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94번째 줄:
 
신라 시조 19년, 임오년(壬午年), 서기 전 39년
 
한나라 원제 영광 5년
 
줄 101 ⟶ 100:
○변한(卞韓)이 그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름의 뜻===
[[양주동 (1903년)|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
<ref>안영희(安英姬), 〈「閼英」의 發祥地「閼川」名義考 - 朴赫居世神話를 中心으로〉 《亞細亞女性硏究 第8輯》(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1969.12) 141쪽. “이에 관하여 梁柱東 博士는 「朴赫居世」의 「赫」을 「朴」의 註記로 보고 「朴」과 「赫」은 둘다 「ᄇᆞᆰ」의 表記로 疊記된 것으로 보았다.<sup>(2)</sup> [...] (1) 梁柱東 「國史古語彙 借字原義考〈國號•地名•始祖•官名•祭政•歌樂名등〉」(明大論文集 1), 1968, pp. 79~89參考[...] (2) 梁柱東, 註1書 p. 82參考”</ref>
혁거세는 빛날 혁,살 거,인간 세.세상에 빛나게 살다라는 뜻이다.
 
신라 시조 21년 갑신년(甲申年), 서기 전 37년
=== 서라벌 개국 ===
한나라 원제 건소(建昭) 2년
혁거세 거서간은 10세 때 남달리 뛰어나고 성숙하였고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 [[6월 8일]]([[음력 4월 28일]] 병진일)에 즉위하고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신라가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ref name="ReferenceA">[[#신채호 (1948)|신채호 (1948)]] 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 듯하다."</ref>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경주시|금성]]에 성을 쌓았으,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ref name="ReferenceA"/>
 
신라 시조 22년, 고구려 시조 2년, 을유년(乙酉年), 서기 전 36년
== 나정의 혁거세 설화 ==
신라 시조 24년, 고구려 시조 4년, 정해년(丁亥年), 서기 전 34년
{{참고|신라혁거세신화|설명=[[신라]] 혁거세 거서간에 대한 [[전설]]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신라 시조 26년, 고구려 시조 6년, 기축년(己丑年), 서기 전 32년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를 지칭)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나정)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일설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신라 시조 30년, 고구려 시조 10년, 계사년(癸巳年), 서기 전 28년
신라 시조 31년, 고구려 시조 11년, 갑오년(甲午年), 서기 전 27년
신라 시조 34년, 고구려 시조 14년, 정유년(丁酉年), 서기 전 24년
신라 시조 38년, 고구려 시조 18년, 신축년(辛丑年), 서기 전 20년
신라 시조 39년, 고구려 시조 19년 · 유리왕 원년, 임인년(壬寅年), 서기 전 19년
신라 시조 40년, 고구려 유리왕 2년, 백제 시조 온조왕 원년, 계묘년(癸卯年), 서기 전 18년
신라 시조 41년, 고구려 유리왕 3년, 백제 시조 2년, 갑진년(甲辰年), 서기 전 17년
신라 시조 42년, 고구려 유리왕 4년, 백제 시조 3년, 을사년(乙巳年), 서기 전 16년
신라 시조 43년, 고구려 유리왕 5년, 백제 시조 4년, 병오년(丙午年), 서기 전 15년
신라 시조 47년, 고구려 유리왕 9년, 백제 시조 8년, 경술년(庚戌年), 서기 전 11년
신라 시조 49년, 고구려 유리왕 11년, 백제 시조 10년, 임자년(壬子年), 서기 전 9년
신라 시조 50년, 고구려 유리왕 12년, 백제 시조 11년, 계축년(癸丑年), 서기 전 8년
신라 시조 52년, 고구려 유리왕 14년, 백제 시조 13년, 을묘년(乙卯年), 서기 전 6년
신라 시조 53년, 고구려 유리왕 15년, 백제 시조 14년, 병진년(丙辰年), 서기 전 5년
신라 시조 54년, 고구려 유리왕 16년, 백제 시조 15년, 정사년(丁巳年), 서기 전 4년
신라 시조 56년, 고구려 유리왕 18년, 백제 시조 17년, 기미년(己未年), 서기 전 2년
신라 시조 57년, 고구려 유리왕 19년, 백제 시조 18년, 경신년(庚申年), 1년
신라 시조 59년, 고구려 유리왕 21년, 백제 시조 20년, 임술년(壬戌年), 2년
신라 시조 60년, 고구려 유리왕 22년, 백제 시조 21년, 계해년(癸亥年), 3년
신라 시조 61년 · 남해왕 원년, 고구려 유리왕 23년, 백제 시조 22년, 갑자년(甲子年), 4년
 
== 박씨 족보와의 차이 ==
[[신라]] 박씨 족보는 혁거세 거서간의 장남 박특(朴忒)을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ref name="선원">{{웹 인용 |url=http://parkssi-munhwa.com/seonwondo/seonwondo01.htm# |제목=신라박씨 선원세계도(新羅朴氏璿源世界圖)<!--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3-1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314150957/http://parkssi-munhwa.com/seonwondo/seonwondo01.htm# |보존날짜=2010-03-14 |깨진링크=예 }}</ref> 하고 있어 혁거세 거서간의 출생이 사료의 기록([[기원전 69년]])보다 이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설로 보고 있다.
 
== 사망 ==
혁거세 거서간은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백성들은 할수없이 양다리와 양팔과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혁거세 거서간의 무덤은 5개가 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들을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뱀 때문애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따로 묻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오릉(五陵)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 가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