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네덜란드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태그: m 모바일 웹
34번째 줄:
== 제1차 전쟁 (1652 ~ 1654) ==
{{본문|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청교도 혁명]] 전쟁 중에 상실한 영국의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이는 영국의잉글랜드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인과 그 선박을 배제하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652년부터 1654년에 걸쳐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서 잦은 분쟁이 벌어졌다. 영국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아시아]]의 특산물을 가득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 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영국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이 초점이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네덜란드에서 만든 대형 군함은 이미 수출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 함대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소형함 중심의 네덜란드 함대가 대형함 중심의 스페인 함대에 항상 승리를 했고, 항로의 보호를 위해 다수의 소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편리하다 등의 이유로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대형 군함 건조를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해안은 수심이 얕기 때문에 흘수가 깊은 대형함을 운용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다.
40번째 줄:
이에 반해 잉글랜드 측은 장비를 잘 갖춘 대형 군함을 투입하여, [[단종진]]이라는 전술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군과 충돌했다. 요한 드 위트 등 일부 진보적 정치인과 현장의 해군 장교들은 대형함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응은 늦었다. 1652년에서 1653년까지 네덜란드의 [[마르턴 트롬프]] 제독은 [[로버트 블레이크 (1598년)|로버트 블레이크]]가 이끄는 우세한 잉글랜드 해군에 분전했지만 장비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는 [[굿윈샌즈 해전]]과 [[플리머스 해전]]과 [[켄티쉬 노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네덜란드는 [[1652년]] 12월에 [[던지네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포틀랜드 해전]]에서 패했다. 중상을 입은 브레이크와 교체된 [[조지 뭉크]]는 [[갇바드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헤이그]] 근해의 [[스헤베닝언 해전]]에서는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고 네덜란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스코틀랜드의 북쪽을 크게 우회하여 네덜란드 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영국잉글랜드 해군은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계속 봉쇄했고, 무역 입국인 네덜란드는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대단한 손해는 입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호국경]]이 있었던 크롬웰은 이상주의적인 [[개신교]] 국가인 영란의 대등한 합방론을 주창했지만, 1654년 4월 화의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로써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곧이어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