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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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 <br/>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 <br/>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이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 조롱하지만 / <br/>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네.<ref name=""hahao"/>}}
 
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 name=""hahao"/> 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ref>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194페이지</ref>
 
===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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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반정]] 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br/>그 결과 [[1517년]]([[조선 중종|중종]] 12년)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증직|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은 [[1519년]](중종 13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화를 받으면서 [[남곤]](南袞<ref>같은 스승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동문이기도 하다.</ref>)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해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중종 반정 직후부터 계속되어 [[1575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1577년(선조 10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군|현풍]]의 [[달성 도동서원|도동서원]],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 문묘 종사 배경 ===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종사를[[문묘|문묘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ref>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의 문하생인데 추향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문묘종사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신중론을 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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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김소형(金小亨) - 본관 서흥
** 아버지 : [[김유]](金紐)
** 어머니 : 한승순(韓承舜)의 딸 - 청주한씨
*** 부인 : 순천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