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oohiyan (토론 | 기여)
태그: m 모바일 앱 안드로이드 앱 편집
초상화 출처 없음
태그: 각주 제거됨 시각 편집
1번째 줄:
[[파일:Emperoryuandinastycollage.jpg|섬네일|400px|[[몽골 제국]]의 카안들.]]
'''카안'''({{llang|mn|{{만몽 유니코드|ᠬᠠᠭᠠᠨ}}|Qa'an}})은 '''카한'''({{llang|mn|{{만몽 유니코드|ᠬᠠᠾᠠᠨ}}|Qahan}}), '''카간'''({{llang|tr|Kağan}}, {{llang|otk|𐰴𐰍𐰣‬|Qaghan}}, {{llang|mn|{{만몽 유니코드|ᠬᠠᠭᠠᠨ}}|Qaγan}}), '''대칸'''(大汗)이라고도 한다. 이는 [[투르크]] 계통 국가의 지도자를 의미했고, [[몽골제국]]에서 '카안'은 여러 명의 '[[칸 (칭호)]]'들을 휘하에 거느리는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 의미 ==
《[[위서]]》(魏書)에는, 구두벌가한(丘豆伐可汗)의 의미를 「'구두벌(丘豆伐)'은 위의 말로 '지휘하여 활짝 열어 젖힌다(駕馭開張)'는 것이며, 가한(可汗)은 위의 말로 '황제'라는 뜻이다.」라고<ref>《위서》(魏書) 열전제91 연연(蠕蠕)조</ref>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카간은 중국어로 황제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사》(北史)에는 「토문(土門)은 마침내 스스로 이리 카간(伊利可汗)을 칭했으니 옛 선우(單于)이다. 그 부인을 가하돈(可賀敦)이라 했으니, 또한 옛날의 알지(閼氏)이다.」라고 했고<ref>《북사》(北史) 열전제87 돌궐(突厥)조, 「土門遂自號伊利可汗,猶古之單于也. 號其妻為可賀敦,亦猶古之閼氏也」</ref>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도 각각 「가한이란 옛날의 선우이며, 아내를 가하돈(可賀敦)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의 알지이다」<ref>《[[구당서]]》(舊唐書) 열전제144상(上) 돌궐조 「可汗者,猶古之單于,妻號可賀敦,猶古之閼氏也.」</ref>, 「토문(吐門)에 이르러 마침내 강대해져서 또한 카간이라 부르니 이는 선우이며, 아내는 가돈(可敦)이라 했다」(至吐門,遂彊大,更號可汗,猶單于也,妻曰可敦)라고 하여<ref>《신당서》(新唐書) 열전제140 상 돌궐조 「至吐門,遂彊大,更號可汗,猶單于也,妻曰可敦」</ref> 카간을 흉노에서 말하던 선우로 지칭하고 있다.
 
[[칭기스 칸]]의 뒤를 이어 [[몽골제국|몽골 울루스]]의 군주가 된 사람은 3남셋째 아들 [[우구데이]]였다. 테무진이 즉위하면서 '칭기스 칸'이라는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것처럼, 우구데이는 '''카안(qa'an)'''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카안' 혹은 '카간(qaghan)'이라는 칭호는 과거에 초원 사회에서 최고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칭기스 칸이 활동하던 당시나 그 직전의 [[몽골리아]]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칭호였다. 12~13세기에는 유목 사회에서는사회의 군주를 부르는 칭호에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본명 뒤에 '칸(qan, khan)'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같이 부르는 방식과방식이고, 또 하나는 본명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칭호를 붙여서 '~모모(某某) 칸'이라고 부르는 방식이었다. 가지예를 방식이들어 있었다칭기스 칸의 선조였던 [[카불]], [[쿠툴라 칸|쿠툴라]] 등이 '카불 칸', '쿠툴라 칸'이라 불렸던 것은 전자의 형식인 반면, '칭기스 칸' 혹은 '[[옹 칸]]([[케레이트]]의 토그릴)' 등은 후자의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구데이가 '카안'의 칭호를 취한 것은 이 두 형식 가운데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몽골제국]]의 최고 군주는 기존의 다른 유목국가의 군주와는 다르다는다르다, 의미를 담고여타의 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으로군주라는 추정한다.<ref관념이 반영된 name="Kimhodong"/>결과가 아닐까 추측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처음에 우구데이를 가리키는 고유적인 칭호로고유명사로 채택된 '카안'이라는 호칭은칭호가 우구데이 사후에는 일반명사로 바뀌었다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트빌리시(Tbilisi)라는 곳에서 1247년에 주조된 은전에서은전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Kūyuk Qā'ān'''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구유크 칸|구육]]이 자신을 '구육 카안'이라 칭했음을 시사한다. 구육의 뒤를 이은 [[뭉케]](Mongke) 역시 자신을 '뭉케 카안'이라고 칭하였다.  이처럼 몽골제국의 군주들은 제 3대 구육 칸의구육의 시대부터는 앞에서 말한 첫째 형식, 즉 '본명 + 칸'이라는 조합에서 '칸'을 '카안'으로 대체한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제 '카안'은 여러 명의 '칸'들을 휘하에 거느리는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ref name="Kimhodong"/>
 
 
이처럼 칸과 카안 칭호의 변화는 몽골제국의 군주가 표방하는 정치적 이념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즉 '카안'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최고 군주이며, 카안이그가 지배하고 통치하는 지역적 범위는 초원지대와 농경지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2~14세기 몽골제국의 시대에 사용된 '카안'과 6~9세기 [[돌궐]], [[위구르 제국]] 시대에 사용되던 '카간'은 비록 동일한 어원을 갖고 의미상으로도 유사한 것이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과거에는 복수의 '카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지만, 몽골의 시대에 복수의 '카안'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카안이 지상의 최고 군주라는 의미의 용례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가 파견한 사신 카르피니(Carpini)가 돌아갈 때 구육이 보낸 서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위대한 백성들을 지배하는 사해(四海)의 군주(Kūr ūlugh ūlūs-nung tālūī-nūng khān)"라고 부르면서, 칭기스 칸과 카안(우구데이)과 자신은 영원한 하늘의 신이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대리인이기 때문에 교황은 유럽의 여러 왕들을 데리고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복속의 뜻을 표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칭기스 칸이 설립한건국한 '몽골 울루스'가 초원지대를 통치하는 유목국가적인 성격을 벗어나 이제는 정주민들이정주와 거주하는유목을 농경지대까지병행하기 시작하며 지배하는 것을 지향하는 '세계제국'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ref 그들의 name="Kimhodong">{{서적눈에 인용|저자=[[김호동]]|제목=[[몽골제국]]이제 세계는 칭기스 일족의 지배를 받아들인 '속민(屬民, il)'[[세계사]]의'반민(叛民, 탄생|시리즈=석학bulgha)'으로 인문구분되었고, 강좌|권=12|출판사=돌베개|2010년'반민'에 8월대한 20일|isbn=9788971994047|쪽121~123}}</ref>정복전은 몽골제국이불가피한 붕괴된것이 되었다. 카안과칭기스 칸의 구분은사후 희미해지다가몽골인들이 [[16세기]]수행한 이후전쟁은 소멸해버렸다단순히 응징이나 약탈이 아니라 정복을 통해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ref>[https[김호동]],《석학 인문강좌 12://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1221195362520 몽골[[몽골제국]]과 황제는[[세계사]]의 ‘칸’이탄생》, 아닌돌베개, ‘카안’이었다]2010, 121~123쪽</ref>
 
== 읽는 법 ==
옛 [[투르크어]]나 [[돌궐 문자]]로 새겨진 돌궐이나 위구르인들의 비문, [[예니세이 비문]] 등에는 「[[파일:Old Turkic letter N1.svg|10px]][[파일:Old Turkic letter G1.svg|10px]][[파일:Old Turkic letter Q.svg|10px]]」(Q.G.N)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 문헌에는 한자로 「可汗」이라 쓰고 「가한」또는「카간」(qaġan/qaγan)으로 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7세기 [[비잔틴 제국]]의 기술에도 [[아바르]] 군주의 칭호를 「Gagan」 또는 「Khaghan」으로 기술하고 있다.
 
== 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