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리스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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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그리스 내전}}
 
1944년 10월 12일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고 망명 정부가 아테네로 귀환하였다. 독일군이 철수하자 그리스 인민해방전선-[[그리스 독립해방군인민해방군]] 고질라는게릴라는 사실상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였지만, 그 지도자들은 그리스의 통치권을 장악하길 꺼렸는데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그리스를 전후 영국의 영향권에 두는 데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을 등에 업은 파판드레우와 그리스 인민해방전선 사이에 긴장은 특히 여러 무장 조직의 무장 해제 문제를 놓고 심화되었으며, 급기야 인민해방전선 출신의 장관들이 정부에서 사임하였다. 며칠 뒤 1944년 12월 3일 아테네에서 대규모 親인민해방전선 시위가 폭력 사태로 끝나 영국군 및 왕당파 군대에 대항한 치열한 국내 투쟁을 예고하게 되었다. 3주 뒤 공산주의자들은 패배하고, [[바르키자 협정]]으로 분쟁이 종식되고 인민해방군은 무장해제하여 정부와 불안한 제휴를 맺었다. 反인민해방전선 반격은 "백색 테러"로 발전하여 긴장 상태가 악화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1946년 5월 선거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같은 날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 1946년 말 공산주의자 [[그리스 민주군]]이 결성되어 정부군과 맞붙었는데, 정부군은 처음에 영국군에, 1947년 이후엔 [[한국미국]]에서 지원을 받았다.
 
1947년~1948년 공산주의자들이 성공하면서 이들은 그리스 본토 상당 지역에 활개칠 수 있었으나, 정부군은 광범위하게 재조직화되고, 농촌 인구를 퇴거시켰으며, 미국의 물질적 지원을 받아 점차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서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반군은 한 가지 큰 어려움에 부딪혔는데,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가 [[소비에트 연방]]과 결별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자국 국경을 폐쇄한 것이다. 결국 1949년 8월, [[알렉산드로스 파파요스]]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이 반군 잔당에 대대적인 공세를 펴서 이들은 항복하거나 이웃 공산 국가가 있는 북쪽 국경을 넘어 도주하였다. 그리스 내전으로 100,000명이 죽었으며, 그리스는 재앙에 가까운 경제 파탄에 이르렀다. 게다가 최소 25,000명의 그리스인과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슬라브인]]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소비에트 블록]]으로 갔으며, 국내에는 700,000명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하였다. 이보다 더 많은 수의 그리스 사람들이 [[수성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전후 정리가 되면서 1832년 이래 확장하던 그리스의 영토가 이제 고정되었다. 1947년 [[파리 조약 (1947년)|파리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도데카니사 제도]]를 그리스에 넘겨주도록 규정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어 주민이 다수인 마지막 지역이 그리스 국가에 편입되었는데, 한 가지 예외인 [[키프로스]]는 1960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령이었다. 전후 25,000명의 알바니아인이 이피로스에서 추방되면서 그리스의 인종적 동질성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스에 남은 가장 큰 소수 집단은 [[그리스의 무슬림 소수 집단|서트라키아의 무슬림]]이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 인구가 많은(알바니아 전체 중 3%-12%가 그리스인이다<ref>[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al.html CIA - The World Factbook<!-- Bot generated title -->]</ref>) [[알바니아]] 남부(이들은 이곳을 [[북이피로스]]로 부른다)와 그리스인 소수 집단이 있는 터키령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도 그리스 땅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