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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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관|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ref name="ccaa 35">CCAA, Erich S. Gruen,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35.</ref>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ref>《로마의 역사: 아우구스투스 시대》 153쪽.</ref>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ref name="eck 3">Eck, 3.</ref>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네 황제의 해|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ref name="eck 124">Eck, 124.</ref>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여덟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