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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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 [[고려]]는 [[원나라]]에 재침략받고 이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는 사회상 불안에 따른 불교단의 타락과 오랫동안 쌓여온 기복 불교(祈福 佛敎)의 폐단은 마침내 고려 사회에 [[배불]]의 싹을 마련하고 있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불교사상#보우의 9산통합|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고려시대의 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槪說〕 > 보우의 9산통합]],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한편 원나라의 쇠퇴는 [[공민왕]]에게 정치상 자주성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 복고 정치를 과감히 수행해 갔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보우와 [[혜근]]은 이런 세상에 출현하여 [[임제종]]의 선풍(禪風)으로 불교를 일상 현실에 살리려고 하였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이들 중에서도 특히 보우는 [[구산]]의 통합을 시도하여 그 과제를 [[조선]] 대(代)에 넘겨주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공민왕이 훗날 《[[청사 (책)|청사(靑史)]]》에 요승으로 기록되는 [[신돈]]을 기용하여 실정한 탓에 배불의 기운이 비등하였고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이에 [[불교]]도 운명을 함께하여 조선 전체가 관여하는 배불책 탓에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탄압받아 쇠락하는 과정을 겪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보우와 혜근을 함께 이은 [[혼수 (승려)|혼수]]의 법맥이 조선에 이어졌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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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는 일찍이 [[만법귀일]](萬法歸一){{.cw}}[[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친 바가 있었지만, 충목왕 2년에 [[중국의 불교|중국]]에 다시 건너가, [[임제]](臨濟)의 제17대 법손(法孫) [[석옥]](石屋)에게서 법을 받고 충목왕 4년에 귀국했다.<ref name="글로벌-보우3"/>
그러나 그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시 (경기도)|광주]]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다.<ref name="글로벌-보우3"/>
그리고 [[선종 구산]]을 통합하여 임제종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복고 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자고 아뢰었다《[[유창선도증국사행장]]》(維昌撰圖證國師行狀)(공민왕 5년).<ref name="글로벌-보우3"/>
[[구산]] 통합과 [[한양]] 천도 계획은 실패하지만, 이런 보우의 행장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현실과 유관한 종교인이었는지 추단할 수 있다.<ref name="글로벌-보우3"/>
== 보우가 등장한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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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참고 문헌 ==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분류=불교}} <!-- 〈고려 후기의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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