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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5월 14일]] [[전라남도]] [[광주군 (전라남도)|광주]]에서 태어났다. [[1925년]] 이래 전라남도 광주청년회 위원장, 광주청년연맹 위원장, 전남청년연맹 지방순회위원, 광주 신우회 임원 등을 지냈다. [[고려공산당]](1921~1922)과 [[조선공산당]](1925~1928)에 가입하여 광주[[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했다. [[1928년]]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활동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조선인 구속 학생의 석방을 위한 여론 확산을 위해 [[장석천]]과 함께 [[경성부]]에 상경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친일일제하 행적행동===
형무소에서 복역 중 [[공산주의]]자에서 전향서를 작성하고 친일파로공산주의에서 변절했다탈퇴했다. 전향한 후 [[박희도 (1889년)|박희도]]가 운영하던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 [[1939년]] 7월호부터 11월호까지 5회에 걸쳐 〈황도조선〉이라는 논설을 게재해 “일본 민족과 일본 국체”를 찬양하고 특히 “조선 민족은 (일본과) 인종적으로 지리, 정치학적으로 운명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명확한 인식이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기고했다. 같은 해 9월 동양지광사(社) 경리부장을 맡았다. 또한 [[내선일체]]를 구현하기 위한 [[동아협회이념연구소]]등을 건립했다. 그밖에도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운동 등 각종 논문 등을 게재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