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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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의 강령에서는 직업적 군대를 방어적 의미의 민병대로 대체하고 무기 및 군수품 공장을 국유화한다는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그대로였지만, 국제연맹 이야기는 사라졌다. [[1921년]] 발표한 강령에서 달라진 파시스트당은 국제연맹을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지중해 라틴 문명의 보루'이자 이탈리아적인 것(Italianita)의 보루로서 이탈리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탈리아의 식민지 개척과 대규모 상비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ref name="fact155"/> [[무솔리니]]는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로마 제국]]의 옛 영광, 반국가 행위자 처벌 등을 주창했다. 이러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대중들의 급격한 동의를 얻으면서 기성의 우파 정당을 대체하여 집권당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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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
{{본문|팔랑헤주의}}
=== 일본 ===▼
{{본문|일본 제국주의}}▼
===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파시즘은 해방 이후 [[이범석]]과 [[안호상]]이 창설한 [[조선민족청년단]]에 의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국민당]] 스타일의 파시즘 강령을 모방하여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청년교육운동에 주력했다. 이들은 결국 미군정의 압력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족청의 주요 인사들은 이승만 정부와 협력하여 재헌헌법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적 성격에 주목한다.<ref name="kho622">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 622</ref> 그에 의하면 박정희의 유사 파시즘적 체제는 [[1972년]] 민주제도를 파괴하고, 영구집권 기반을 확립한 '10월 유신'으로 성립했다. 박정희식 유사 파시즘은 '민족성 개조'라는 이름의 국민의식 개조운동과, 공포와 폭력이라는 물리적 탄압의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공고해졌다.<ref name="kho622" /> 박정희는 그해 [[10월 17일]]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실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통해서 유사 파시즘 체제의 시동을 걸었다.<ref name="kho380">고종석, 히스토리아 (도서출판 마음산책, 2003) 380페이지</ref> 유신헌법은 그 유사 파시즘 체제의 법적 표현이었다.<ref name="kho380" /> 의식개조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이순신]] 성웅화' 작업이 표본이다. 농촌 새마을 운동에서 시작해 도시-공장-학교 새마을 운동으로 번진 이 운동은 "10월 유신과 영구 집권에 필요한 대중동원 수단"이자 "유신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이었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이순신]]은 "'나'는 없고 '국가'와 '민족'만 있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의 정신"이었다.<ref name="kho622" />
▲=== 일본 ===
=== 영국 ===
{{본문|영국 파시스트 연합}}
=== 오스트리아 ===
{{본문|오스트로파시즘}}
=== 루마니아 ===
{{본문|철위대}}
{{본문|군단주의}}
=== 헝가리 ===
{{본문|화살십자당}}
{{본문|국민협동정부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본문|우스타샤}}
{{본문|크로아티아 독립국}}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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