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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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573년)|덴쇼기]]에 들어서면서 노부나가는 다방면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다. 수하 장수에게 [[다이묘]]급의 영지를 주어 주변을 공략하였다. 연구자 중에는 이들 신설 다이묘를 '''군단''' 또는 '''방면군'''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일반 서적에도 꽤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러한 명칭이 없었다.
 
겐신 사후, 뒤를 이은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 대해 [[시바타 가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등으로 호쿠리쿠를 공략하였고, [[다케다 가쓰요리]]에 대해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 다키가와 가즈마스, [[모리 나가요시]] 등으로 시나노, 가이를 공략하였다.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에 대해서는 아케치 미쓰히데,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으로, 주고쿠의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는 [[하시바 히데요시]] 등으로, 셋쓰의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해서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오다 군은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문과의 전투에서 노토, 가가를 탈환해 [[엣추노쿠니|엣추]]를 공략하였다.
 
덴쇼 6년([[1578년]]) 음력 3월 [[하리마 국|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모리 가문과 결탁해 모반을 일으킨다. 동년 음력 7월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를 필두로 한 아마고 가문 부흥군의 [[고즈키 성]](上月城)이 모리 가문에 함락되어 아군이던 아마고 부흥군은 멸망한다. 동년 음력 10월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도 모반해 [[이시야마 혼간지]]와 결탁, 노부나가에 대항하였다. 한편, 무라시게와 동조했던 셋쓰 동부의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 [[다카야마 시게토모]](高山重友)는 오다 군의 공격과 협박에 의해 항복하였다.
 
동년 음력 11월 6일 [[제2차 기즈 강하구 전투]]에서 모리 수군이 대패하였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아라키 무라시게는 보급이 끊겨 고립된다. 덴쇼 7년(1579년) 여름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는 항복하였지만 처형되었고, 동년 음력 9월에 아라키 무라시게는 처와 자식을 남겨둔 채 [[아리오카 성]](有岡城)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아리오카 성은 함락되었고, 아라키 일족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동년 음력 10월 [[비젠노쿠니|비젠 국]]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모리 가문을 배반해 오다 가문에 복속하자 전황이 역전되었다. 덴쇼 8년(1580년) 벳쇼 나가하루는 성안의 병사와 영민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하였고, 자결하였다([[미키 전투]]). 또, 혼간지 불교세력과는 동년 음력 4월 [[오기마치 천황]]의 칙령이 내려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하였다. 이 화친조약의 조건에 따라 혼간지 세력은 오사카로부터 퇴거하였다. 이로써 하리마를 비롯 단바, 셋쓰를 평정하였고, 덴쇼 9년(1581년)에는 [[이나바노쿠니|이나바]]의 [[돗토리 성]](鳥取城)을 비롯 [[아와지로노쿠니|아와지로]]의 [[이와야 성]](岩屋城)을 공략하였다.
 
덴쇼 7년([[1579년]]) [[이세노쿠니|이세]]의 [[지성]]구축을 방해한 [[이가노쿠니|이가]]의 호족에 화가 난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독단으로 이가 국을 공격했지만, 대패하였다. 노부나가는 노부카쓰을 엄하게 질책하고, 이가 호족에 대한 적의를 품었다(제1차 덴쇼 이가의 난). 그리고, 덴쇼 9년([[1581년]]) 노부카쓰를 총대장으로 6만의 군세로 이가를 공략하여 오다 가의 영지로 삼았다(제2차 덴쇼 이가의 난). 이 당시 이가의 지방 호족들과 닌자들은 대량으로 학살되었고, 이후에도 닌자들은 몇 차례 노부나가 암살을 도모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