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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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배경 ====
이자겸은 [[개경]]에서 [[고려 문종]]의 장인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 (고려)|이자연]]의 손자이자 상서좌복야 [[이호 (고려 전기)|이호]]
경원이씨 집안은
이자연에게는 11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호부]][[낭중]]을 지낸 [[이호]]도 끼어 있었다.<ref name="pare1996244"/> 바로 여섯째 아들이 이자겸의 아버지인 [[이호]]였다. 하지만 [[고려 선종|선종]]이 어린 [[고려 헌종|헌종]]에게 선위하여 왕숙으로 있던 [[고려 숙종|숙종]]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과정에서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의]](그의 사촌형이기도 하다.)가 축출되는 바람에 그의 가계는 몰락 위기를 맞이한다.<ref name="pare1996244"/> 그러나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최충]]의 손자인 장인 [[최사추]]는 당시의 여론을 주도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ref name="dangtack136">김당택,《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푸른역사, 2006) 136페이지</ref>
==== 음서와 관직 임용 초기 ====
이자겸은 명문가에 태어난 덕분에 [[음서 제도|음서]]로 벼슬길에 올랐고, 바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이호는 자신의 딸을 [[고려 문종|문종]]의 맏아들 [[고려 순종|순종]]에게 시집보내 외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ref name="pare1996244"/>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그는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그에게<ref name="pare1996244"/> 요직이 맡겨졌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다지 큰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직된 후 이자겸은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자신의 둘째 딸(훗날의 [[순덕왕후]])을 [[고려 예종|예종]]에게 시집보내면서 다시금 출세가도를 달린다.<ref name="pare1996244"/> [[1107년]] 둘째 딸이 예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다. 이는 당시 [[여진]]족 정벌에 따른 문신들의 반발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1108년]], 후궁이던 둘째 딸이 예종의 비(妃)가 되고 이듬해 인종을 낳았으며, 이후로도 예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정2품 문하[[평장사]]로 승진했고, 동시에 그의 아들들도 함께 승진되었다. 그 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지내고,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작되었다.
==== 왕위계승전과 인종 옹립 ====
[[고려 예종|예종]] 집권기간 중 그는 외손자인 태자 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예종대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이들 두 세력이 치열한 왕위계승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한 예종은 이자겸의 힘을 믿고 14세의 어린 태자 구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ref name="pare1996243"/>
===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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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년]] 예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하늘에 쾌유를 빌었으며, 명산대찰을 방문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고려 예종|예종]]이 [[종양]]으로 병석에 눕게 되어 한달만에 죽게 된다.<ref name="pare1996245"/> 그는 민첩하게 궁궐을 장악하고 외손 [[인종]]을 옹립한다. 예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노리는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유조(遺詔 : 임금이 세상을 떠나며 내리는 조서)에 따라 인종을 등극시키는 데 공헌했다.
어린 인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자겸은 절대권력을 차지하게 된다.<ref name="pare1996245"/> 이자겸의 힘에 의지하여 왕위에 오른
인종을 추대한 공로로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에 책록되고 [[중서령]](中書令) 겸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에 임명되어 판이부사(判吏部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를 겸하였으며, 식읍 8천 호와 식실봉 2천호를 하사받았다.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지는 한편 여러 아들들의 관직도 승급되어 그의 일문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종실, 한안인 등과의 대립 ====
[[1122년]]
이자겸의 정적은 크게 두 부류였다. 첫째는 [[고려 예종|예종]]의 아우 왕보로 대표되는 종실 세력이었고, 둘째는 [[한안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출신 관료 세력이었다.<ref name="pare1996245"/> 이자겸은 신진 관료를 대표하는 인물인 [[한안인]]
[[왕보]]를 비롯한 예종의 아우들은 덕종, 선종, 숙종의 선례에 따라 어린 태자 대신 자신들 중의 한 명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건의 발단은 한안인이 이자겸의 독단적인 처사를 비방하면서 시작된다. 한안인은 이자겸이 나라의 최고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모두 제집에서 처결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비방했다. 또 이자겸이 최유적을 급사중으로 임명하자, 한안인은 내급사중으로 있던 장흥추에게서 최유적이 이자겸에게 노비 20명을 뇌물로 주고 급사중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사실인 것처럼 공석에서 발표해버렸다.<ref name="pare1996245"/> 그러나 이자겸이 시비를 가리길 청하자 부끄러워하면서 한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한안인이 칩거하자 한때 그와 함께
때마침 지난날의 일로 한안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태의(太醫) [[최사전]](崔思全)이 한안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한안인이 음모를 꾸민다고 이자겸에게 모함하였는데, 한안인이 [[인종]]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기던 점과 왕제들의 즉위에 동조했던 점을 눈여겨 본 이자겸은 이를 빌미삼아 대방공(帶方公) [[왕보 (대방공)|왕보]]
이어
==== 금나라와의 사대 관계 ====
[[1115년]] 건국한 후 날로 강성해지고 있던 [[금나라]]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1126년]] 음력 3월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 일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금나라에서는 이미 [[1117년]] 사신을 보내 금나라 황제가 고려 왕의 형이라 자처한 적이 있었고, 고려에서도 금나라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사대외교는 하지 않았으며, [[천리장성]]의 성벽을 석 자 더 쌓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의 대신들은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것은 물론, 국교를 맺는 것 조차 극렬히 반대했으며 심지어 그 사신을 죽이자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가 강성하므로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이자겸 등이 대궐을 불태우고 반대파를 숙청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의 말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음력 4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 권력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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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 등극한 후 이자겸이 자신의 외조부라는 이유로 특별한 예우를 하고자 했으며 1122년 음력 10월에는 한양공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이자겸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1124년 음력 7월 조선국공으로 높여 책봉하도록 만들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위세가 드높아지고 인종이 어린 것을 이용하여 섭정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임의로 국사를 자신의 집에서 처리할 때가 많았는데, 사사로운 청탁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안인, 최거린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신하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안인]]을 제거한 이자겸은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ref name="dangtack136"/> 또한 왕위를 노리는 왕숙들까지 제거했다. 그러나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반대파들도 숙청하여 조정을 장악한다. 이자겸은 권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차례로 왕과 결혼시켜 왕비로 삼게 하였다.<ref name="pare1996245"/> 당시의 관리들에게 정치권력이 이자겸 1인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ref name="dangtack136"/> [[유학자]]들은 이를 비난하였지만
그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고려 인종|인종]]의 비로 들였는가 하면 숭덕부(崇德府)라는 부를 설치하였다.<ref name="dangtack136"/> 그러나 고려에서의 부는 왕자나 왕비에게만 설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리가 부를 설치했을 경우 그의 지위는 왕자나 왕비와 다를 바 없었다.<ref name="dangtack136"/> 또한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매관매직하여 재산을 축적하였으며, 스스로를 국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등급을 왕태자와 대등하게 보고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도록 했다.<ref name="pare1996245"/> 그는 예종 때에 식읍을 하사받았는데, 그는 한때 조정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자신에게 부여된 식읍의 주부(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쳐서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자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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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자식들까지도 경쟁적으로 큰 집을 신축하여 [[개경]] 거리에 그들의 집이 나란히 인접하게 되었다.<ref name="dangtack136"/> 그러나 껄끄러울 것이 없어진 그의 자제들은 부패 행위를 일삼아 문제가 되었다.
이자겸의 아들들과 친척들도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등 횡포를 부렸으며, 특히 출가한 막내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은 [[교종]]
[[고려사]]는 당시 그들이 이 같은 재산 축적을 '그 세력이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며 사방에서 음식 선물 등이 들어와 항상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자기 집 종들을 앞세워 남의 수레를 약탈해다가 자신의 물자를 수송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때려부수고 우마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길이 소요스러웠다'고 표현하고 있다.<ref name="dangtack136"/> [[어사대]] 등의 언관들은 이자겸의 월권행위를 비판했고 [[인종]]은 이자겸의 제거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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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이자겸 제거 시도 ====
{{참고|이자겸의 난}}
1124년 음력 1월 모친상을 당해 표면적으로는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실제로는 [[최홍재 (고려)|최홍재]]가 자신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욕지도]]로 귀양보내는 등 여전히 권세를 부렸다. 그해 음력 5월에는 조서에 이름을 쓰지 않고 경으로 부르지 않게 하는 특혜를 받았으며, 이자겸의 집은 [[의친궁]] [[숭덕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이자겸을 따르던 [[박승중 (고려)|박승중]]은 조정에서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로 부르자고 하였는데, 생일에 절을 붙이는 것은 원래 국왕과 태자에게만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김부식]]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켜 가던 이자겸은 사사로이 [[송나라]]에 숭덕부 관원을 사신으로 보내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 : 국사를 처리하는 직책)로 칭했으며, 인종에게도 지군국사로 책봉해 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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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에게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한 사람은 내시 [[김찬]]과 [[안보린]]이었다.<ref name="pare1996247"/> 그들은 인종에게 누차에 걸쳐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청하여 동의를 얻은 뒤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을 포섭하여 왕명이라며 이자겸을 체포할 것을 부탁한다.<ref name="pare1996247"/>
[[1126년]] 음력 2월, 인종의 측근인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 (고려)|김찬]]
이들 무장들은 병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과 그의 동생 [[척준신]]을 매우 싫어했던 사람들이었다.<ref name="pare1996247"/>
[[이자겸의 난]]은 이자겸이 먼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고려 인종|인종]]과 그의 측근 관리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이자겸 제거를 기도했던 것이다.<ref name="dangtack137">김당택,《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푸른역사, 2006) 137페이지</ref>
==== 이자겸의 반격 ====
한편 이자겸 제거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인종]]은 [[내시]] [[김찬]]을 원로 [[김인존]]과 [[평장사]] [[이공수|이수]]에게 보내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도록 한다.<ref name="pare1996247"/> 김인존과 이수는
[[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그리고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한다. [[지녹연]],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더불어 거사하여 대궐을 장악하여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상서(兵部尙書) [[척준신]]
이와 함께,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 최영 등도 함께 제거하였다. 그러나 내직기두 학문이 성벽을 타고 넘어가 [[중랑장]] [[지호]]를 통하여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였다.<ref name="pare199624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8페이지</ref>
[[최탁]] 등의 공격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척준경]]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의장이 거느리고 온 현화사의 승려 3백여 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도록 명하였다.<ref name="dangtack137"/> 이자겸과
척준경의 명령을 받은 소장들은 궁성에 도착하자 자물쇠를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반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ref name="pare1996248"/> 그러나 궁성병력은 그들의 숫자가 많은 줄 알고 문을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았다.<ref name="pare1996248"/> [[2월 26일]] 아침 이자겸은
==== 궁궐 장악과 인종의 양위 사태 ====
이자겸과 사돈인 척준경이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했으며, 출가한 아들 의장(義莊)도 현화사(玄化寺)의 중 3백을 이끌고 이자겸, 척준경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합세하였다. 이자겸의 군사가 궁궐을 장악하자 이자겸은 [[인종]]에게 난을 일으킨 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종은 듣지 않았다.
궁궐을 장악한 이자겸은 합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사 녹사 소억을 궁문 밖까지 보내서
이자겸이 왕위를 노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궁지에 몰린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조서를 보냈는데, [[이공수]](李公壽)가 공개적으로 반대한 데다가 여론을 의식하여 본심을 숨기고 조서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궐하자
결국 궁성은 함락되었는데 이자겸은 국왕에게는 어떻나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최탁]], [[오탁]] 등만을 제거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지었다.<ref name="dangtack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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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한 이자겸은 문하시중을 대신하여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은 죽임을 당한 자파 인물들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척준경 등 수하들의 벼슬을 높이는 한편 인종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오게 한 다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자신이 국사를 처리하였다. 더욱 기고만장해진 이자겸은 문무 백관이 인종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같이 받기도 했으며, 도참설 중 하나인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 십팔자(十八子) 성씨, 곧 이(李)씨가 나라를 얻음)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둘째 왕비가 된 넷째 딸이 몰래 인종을 돕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해버리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제했다.<ref name="pare1996250">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0페이지</ref> 그러나 인종은 다시금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내의원 [[최사전]]과 모의하고
또한 그때 마침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가 척준경의 집사와 시비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ref name="pare1996250"/> 어떤 일로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상전을 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ref name="pare1996250"/> 이지언의 집사가 홧김에 '너희 상전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고, 너도 마땅히 관노로 글려가야 될 터인데 감히 네놈이 나를 욕해!<ref name="pare1996250"/>" 이 말이 곧
난처한 입장이 된 이자겸은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으나
==== 인종 독살 미수 ====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는 [[척준경]]을 회유했는데, 때마침 이자겸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
그는 다시 도참설에서 유래된 파자점(破字占)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십팔자가 왕이 된다'고 하였다.<ref name="pare1996251">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1페이지</ref> 그런데 자신의 성씨인 이(李)자를 분해하면 십팔자가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ref name="pare1996251"/> 그래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독이 든 떡을 왕에게 올렸다. 하지만 떡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의 넷째 딸인 왕비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은밀히 떡 속에 독이 들어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인종은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까마귀]]에게 떡을 던져 주었다. 그랬더니 떡을 먹은 까마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ref name="pare1996251"/>
이자겸은 또 독약을 보내 왕비더러 왕에게 먹이라고 했는데, 딸인 왕비가 그릇을 들고 가다가 고의로 넘어져서 독약을 엎질러버리기도 하였다.<ref name="pare1996251"/> 이자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을 독살하려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 몰락과 죽음 ===
결국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바치고, [[1126년]] 음력 5월 [[김향]](金珦)·이공수와 더불어 대궐로 들어가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한 다음 이자겸을 불러냈다.
그러나 도성에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는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병력 1백여 명을 이끌고 광화문에 도착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ref name="pare1996252"/> 그래서 이자덕, 김인규 등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병부로 갔다. 그때까지도 이자겸이 체포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ref name="pare1996252"/> 그러나 그날 저녁 모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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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인종은 [[1129년]]<ref>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는 이자겸이 죽고 3년이 지나 그 부인 최씨를 불러들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1145년(인종 23년) 여름 4월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들에게 양곡 6백 석(碩)을 하사하였다.
== 평가와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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