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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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평양
|지위 = 수도
|그림
|https://en.wikipedia.org/wiki/Pyongyang#cite_note-6
|그림설명
|위치지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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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언 = [[서북 방언]]
|면적 = 21,000747.7 km²<ref name="면적">[[2010년]] 행정 구역 축소 전의 2,629.4 km²에서 [[2010년]]에 [[황해북도]]로 이관된 [[승호구역]] 159.3 km², [[중화군]] 232.4 km², [[상원군]] 490 km²를 제외한 면적. 이들 지역과 함께 [[황해북도]]에 편입되었던 [[강남군]](160.3 km²)은 [[2011년]]에 평양직할시로 재편입되었다.</ref> 평양 밖의 지역을 체제 선전, 특권 부여를 위해 평양에 편입시키는 사례가 있다. 정말 멀리 떨어진 곳을 월경지 형태로 평양에 편입시켜버렸다. 묘향산
평양 밖의 지역이 편입된 첫 번째 사례. 구 향산군 묘향산에서 모란봉구역에 편입되었다. 방현동
구 구성시 방현동. 북한의 미사일 관련 시설이 밀집해있는 곳으로 이 곳에 거주하는 미사일 관련 종사자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2018년 2월 10일 평양에 편입되었다
|인구 = 2,999,466 명<ref name="UNFPA">[http://kosis.kr/bukhan/statisticsList/statisticsList_01List.jsp 북한통계>인구일제조사>2008년>인구>도, 시/구역/군, 도시/농촌별, 성별인구] 통계청 북한통계, 2018년 10월 7일 확인.</ref><ref name="인구">[[2008년]] 평양시 인구 325만5288 명에서 [[승호구역]]의 8만5624 명, [[중화군]]의 7만7367 명, [[상원군]]의 9만2831 명을 제외한 인구.</ref>
|인구년도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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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도시의 중심으로 [[대동강]]이 흐르며,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 때에는 서경(西京)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평안도]] [[감영]] 소재지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별칭으로 '''혁명의 수도'''라고 부르며, 옛 [[소련]]의 건물 양식과 유사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한국 전쟁]] 때는 잠시 [[유엔군]]이 점령한 적이 있다. 1967년부터는 인구 증가로 인해 신도시 건설을 추진, 다양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평양의 면적은 21,000747 km²<ref name="면적"/><ref name=py2010>[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447608 北, 경제난에 평양 면적 반토막·주민 50만명 줄였다] 국민일보, 2011.2.14.</ref><ref name="강남군 재편입">[http://v.media.daum.net/v/20120229062106165 北 평양시 행정구역 일부 개편] 연합뉴스, 2012.2.29.</ref>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 면적의 1.42%를 차지하고, 인구는 약 300만 명이다.<ref name="UNFPA"/><ref name="인구"/>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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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준평원(平壤準平原)에 위치해 있다. 북쪽, 동쪽과 서북쪽은 [[평안남도]]에, 서남쪽은 [[남포특별시]]에, 남쪽은 [[황해북도]]에 접한다.
 
평양에는 [[대동강]]이 흐르는데, 강 좌측에 형성된 중심부를 '''본평양'''(本平壤), 서쪽을 '''서평양'''(西平壤) 그리고 강을 건너 동쪽에 형성된 시가지를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기도 한다. 평양시의 중심은 중구역이며, [[1950년대]] 이래 내각청사, [[인민대학습당]], [[조선미술박물관]], [[평양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특색있는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창광거리]], [[영광거리]], [[광복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 거리, [[통일거리]] 등이다. [[인민대학습당]] 앞에는 [[김일성광장]]이, 부근에는 [[주체사상탑]]이 있는데 평양의 상징이 되고 있다.
 
공민등록법의 규정에 따라 '17세 이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은 공민증을 발급받지만, 평양시민은 1997년부터 특별히 '평양시민증'을 발급받아 다른 지역 주민과 차별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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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형 ==
[[파일:Pyongyang satellite image 2007-08-22.jpg|250px|섬네일|평양직할시의 위성 사진]]
평양은 낮은 [[구릉]]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평야]]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다. 주요 산은 [[만경대구역]]에 있는 [[룡악산]](龍岳山), [[중구역]]에 있는 [[창광산]](蒼光山), 대동강구역의 [[문수봉]](紋繡峰)이 있다. 대부분 산은 휴양지나 유원지로 만들어졌다.
 
중심지에 위치한 산은 [[모란봉]](95m)이고, 그 동쪽 주변에 대성산(270m)이 있고, 그 북쪽으로 청운산(373m)과 용골산(400m)이 있다. 모란봉의 동쪽의 비교적 높은 산지가 시작하는 초입에는 제령산(498m)이 서 있다.<ref name="pyup">권영덕, 나도삼, 장남종, 민현석, 강지한, 김현수, 안병민, 안창모, 이왕기, 정수인, [http://opengov.seoul.go.kr/research/8601386 평양 도시계획 이해하기], 서울연구원, 2016년 6월 1일 등록.</ref>
 
평양은 [[여름]]이 되면 [[홍수]]가 발생하여 [[농업]]이 어려웠으나, [[김일성]](金日成)이 직접 지시하여 [[보통강]](普通江)의 관개공사를 실시함으로써, 홍수 피해가 줄어들었다적어지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이 보통강을 옥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선전(宣傳)하며, [[보통강구역]]에 기념탑이 건설되었다. [[보통강]] 근처에는 보통강유원지가[[보통강유원지]]가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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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mb of King Tongmyong, Pyongyang, North Korea.jpg|섬네일|250px|[[동명왕릉]] 근처에 있는 [[정릉사]]2]]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기원전 108년에108년]]에 [[한나라]]는 고조선의 옛 영토에 [[한사군]]을 세웠는데 현재의 평양 지역에는 [[낙랑군]]을 세웠다.
 
[[313년]] [[고구려]](高句麗)는 낙랑군을 축출시켜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427년]] [[장수왕]](長壽王)이 이 곳으로 천도(遷都)해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다. [[668년]] [[신라]](新羅)와 [[당나라]](唐)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되자, 당나라는 이 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전체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획책했으나, 신라의 저항으로 안동도호부는 얼마 되지 않아 요동(遼東)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남북국 시대의 평양은 신라와 [[발해]](勃海) 양국의 변경(邊境)으로 남겨졌다.
 
=== 고려시대 ===
{{참고|서경 (고려)|l1=서경}}
[[고려|고려시대]](高麗)에는 서경(西京)으로 불려 중요시되어,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켰다. [[947년]] [[고려 정종 (3대)|고려 정종]](定宗)은 [[도참설]]에 따라 서경성(西京城)을 쌓고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고, 1136년에는[[1136년]]에는 [[고려 인종]](仁宗)에게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이 [[서경천도론]]을 건의하여 추진되었으나,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의 반발과 민심의 이탈로 인종이 중지를 명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고려 말기 [[신돈]](辛旽)은 [[공민왕]](恭愍王)에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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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평양은 조선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 [[평안도]](平安道) [[감영]] 소재지로서 관서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1871년]] [[신미양요|제너럴 셔먼 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는 [[청나라|청군]](淸軍)과 [[일본제국 육군|일본군]] 사이의 격전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1896년|1896]]([[건양]] 1)년 평안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자 [[평안남도]]에 소속되었다.
 
[[구한말]]기에는 [[기독교]]가 크게 확산되었는데, https://en.wikipedia.org/wiki/Pyongyang#cite_note-6<nowiki/>[[1901년]]부터 평양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라는 [[장로교]] 신학교가 문을 열었고, 최초의 장로교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는 오랜기간동안 지역차별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 적지않게 있어서 지역 향반(향리)와 일반 평민의 삶은 차이가 크게 없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에서는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평민문화 및 상업문화가 일찍이 발달하였고, [[기독교]] 신자가 상당히 많이 거주했었다.<ref>《[http://www.yes24.com/24/goods/4130859?scode=032&OzSrank=1 한국사 시민강좌: 47집(2010년) - 특집,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 장규식 저. p135~148</ref>
 
=== 일제 강점기 ===
[[파일:View of Heijo1.JPG|섬네일|250px|일제 강점기의 평양]]
 
[[1913년]] [[조선총독부]]는 평양을 부(府)로 지정했으며<ref>{{서적 인용|저자=[[이이화]]|제목=한국사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바람|연도=2004 |출판사=한길사|쪽=27}}</ref>, [[1914년]] 평양부의 영역을 시가지 일대로 축소시키고, 교외 지역을 [[대동군]]으로 분리하였다. [[1938년]] 대동군 대동강면, 서천면, 추을미면을 편입하여 영역이 확장되었다.
 
[[1920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의 일환인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의 여파로 평양에서 [[1931년]] [[7월 5일과5일]]과 6일에[[7월 6일|6일]]에 일어난 반중(反中)·반[[화교]](反華僑) 폭동은 극심해, 중국인 수백 명이 사망, 부상 및 실종되었다<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2/06/200802060500006/200802060500006_2.html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2 -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신동아]] 2008년 2월호)]</ref>.
 
=== 현대의 평양 ===
광복 후 [[38선]] 이북은 [[한국의 군정기|소련군정]](蘇聯軍政)이 들어섰다. 1948년에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1946년]] 9월에는[[9월]]에는 북부 지역의 실질적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부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의 5개 구역을 포함하는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1950년]] [[10월 1일에1일]]에 [[38선]]을 넘자 [[10월 9일]] [[김일성]]의 [[부대]]와 [[정부]], [[조선노동당]] 등 주요 기관이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1950년]] [[9월 28일에28일]]에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收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뇌부와 주요 기관, [[단체]], [[부대]] 등을 [[평양]]에서 후퇴시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1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자 [[10월 9일부터9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철수|평양 후퇴작전]]이 전개되었고,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평양에서 후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10월 24일]]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11월 26일부터26일]]부터 본격적 공격을 개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6일]]에 [[평양]]으로 재입성하였다. 남한의 국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하면서 [[직할시]]로 변경되었고, 1956년에[[1956년]]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을 신설하였으며, 1967년부터[[1967년]]부터{{출처|날짜=2010-2-17}} 본평양(本平壤), 서평양(西平壤),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고, 1972년에는[[1972년]]에는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 수도가 되었다. [[2006년]]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평양은 [[한국 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공공건물과 공장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가공공업의 발달로 동평양과 중구엔 5층 내지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천리마(千里馬)거리와 창광거리, 역전(驛前)거리를 비롯한 큰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평양에 속했던 [[중화군]]<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794&cid=40942&categoryId=39872 중화군] 동아백과, 2017년 8월 6일 확인.</ref>, [[상원군]]<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9948&cid=40942&categoryId=39872 상원군] 동아백과, 2017년 8월 6일 확인.</ref>, [[승호구역]]<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57721&cid=46629&categoryId=46629 승호구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7년 8월 6일 확인.</ref>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인 [[2011년]] 이 중 [[강남군]]만 평양직할시로 재편입되었다.<ref name="강남군 재편입"/>
 
구 향산군 묘향산에서 모란봉구역에 편입되었다. 2018년 2월 10일 구 구성시 방현동이 평양에 편입되었다.
 
평양은 도농통합형 도시를 추구하고 있으며, 평양 전체의 토지 중 시가지 면적은 20% 이하이고, 농지 면적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농산물의 자급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하였다.<ref name="py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