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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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집권한 노론은 [[1689년]](숙종 15년)에 남인계 출신의 후궁인 [[희빈 장씨|장희빈]]이 낳은 왕자(나중의 경종)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그동안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송시열]]·[[김수항]] 등이 보복을 받아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남인 집권기에는 청나라의 내란과 관련하여 강화도에 성을 쌓고, 맞은편의 [[통진]]에도 [[문수산성]]을 쌓는 등(1694년) 수도방위를 강화하였다.‘기사환국’으로[[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도 [[1694년]](숙종 20년)에 왕이 마음을 바꾸어 폐위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과 연결된 [[희빈 장씨|장희빈]]을 강등시키게 되자 5년 만에 다시 밀려나게 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갑술환국]]이라 하는데,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은 [[서얼]]·[[역관]]·[[무인]]·[[상인]] 그리고 [[노비]]층과도 연결하여 남인 측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거사 자금과 힘을 빌렸다.
 
1694년(숙종 20년)부터 1720년(숙종 46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빙기]](小氷期)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 현상을 가져왔다. 더욱이 1697년(숙종 23년)에는 10여 년 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장길산]](張吉山)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매우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숙종 대에 대동법을[[대동법]]을 황해도 지방까지 확대하였으며(1708, 숙종 34년), 서북인을 무인으로 대거 등용하고(1709년), 중인과 서얼을 수령에 등용하도록 조처했다(1697년, 숙종 23년). 특히 1712년(숙종 38년)에는 청과 북방경계선을 확정지어 [[백두산]] 아래에 정계비를 세워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삼았다. 여기서 [[토문강]]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서 정해졌지만, 조선 측은 그 후 이 강을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백두산 정계는 조선 측의 영토 확장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다.
 
한편, 수군 출신의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일본은 이를 인정했다(안용복의 증언. 이에 대해 현재 일본 정부는 울릉도 도항 금지라는 사실은 있었지만 독도를 조선의 영토 인영토인 것처럼 일본 측이 인정한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있다).(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방정책을 강화하면서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울릉도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1705년(숙종 31년)에는 노론의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가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명의 태조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창덕궁 안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순신 사당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리고(1707년, 숙종 33년),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하여(1709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숙종 말년에는 [[남구만(南九萬)]]의 노력에 의해 세종 때 설치했다가 폐지한 ‘폐사군’의 일부를 복설하여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강화도의[[강화도]]의 농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고, 강화도 내성(內城, 1704년~1709년), [[북한산성]](1711년~1712년), [[평양성]], [[안주성]] 등이 잇따라 축조되어 방위체제가 훨씬 강화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삼남지방에서 양전 사업이 완료되어 총 66만 7,800결을 얻고, 전국의 인구는 680만 명으로 늘어났다(1720년). 숙종 때에는 문화 사업 면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대전속록》, 《열조수교》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