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준 (189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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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해 물러간 후에도 [[조선임업회]] 회장에 당선되고 [[대한산림회]] 연합회장을 겸임하는 등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녹화사업 분야에서 유력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김화준은 별다른 반성이 없었으며, 반민특위는 "민족의식을 망각한 기회주의적인 파렴치적 가증한 악질 민족반역자"라는 의견서를 냈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이 무력화되면서 "산림녹화사업을 통하여 대한민국건국사업에 다대한 공헌"이 있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로상을 수한 자"라는 이유로 공소 취소 처분되어 처벌 받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 실종되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ref>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 [http://www.kwari.org/sub2a_info.php?num=114186 김화준 (金化俊)]{{깨진 링크|url=http://www.kwari.org/sub2a_info.php?num=114186 }}</ref>.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의 세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