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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견은 [[북주]] [[북주 무제|무제]]에게 수주(隨州)자사의 벼슬을 받았고, 나중에 양충이 죽자 수국공도 습작했다. [[573년]]에는 큰딸 여화를 북주의 황태자인 [[북주 선제|우문윤]]에게 시집보냈고,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등의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578년]]에 우문윤이 황제가 되자 황제의 장인으로서 양견의 실권은 더 커졌고, 이듬해에 자신의 외손자인 [[북주 정제|정제]]가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승상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인 [[580년]]에는 수왕(隋王)에 책봉되었다.
 
[[581년]]에 우문연은 양견에게 제위를 선양하였고 양견은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는 개황(開皇)으로, 국호는 수로수(隨)로 고쳤다. 본래 문제는 [[낙양]]에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 개황의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