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이면주 정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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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주(1818~1871)는 공주 의당 용암리 양촌에서 태어나 효심이 지극하여 항시 부모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부친께서 무거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상분자지주혈하는 등 부친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하루는 약을 구하기 위하여 몇 십리를 헤매다가 피곤하여 잠깐 눈을 부치고 있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약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어째서 멀리만 뛰어다니냐고 하므로 그는 약이 가까운 곳에 있다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즉, 너의 아버지 병에는 꿩밖에 다른 약이 없느니라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보니 밤이 깊었다. 내일 아침엔 꿩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꿩을 잡을 궁리를 하다가 동이 틀 무렵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살에 탁하고 부딪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언듯 부딪히는 것을 바라본 즉 그것은 꿩이었다. 그는 땅에 떨어져 파닥거리는 꿩을 잡으려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로 꿩이 날더니 집기둥에 부딪혀서 꿩 한 마리가 또 떨어졌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천신이 아버지를 돕는 것이라 생각하고 꿩으로 약을 했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바로 낳았다. 그 후 또 부친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는 또 사방으로 뛰어 다녔고 천신께도 기도를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그가 생각하기를 위독할 때는 사람의 피를 먹이면 병이 쉬 고쳐진다는 말을 듣고 그는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내어 아버지께 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금 병환이 나은 것 같았으나 그 후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 같은 지극한 이면주의 효행에 감탄한 유림들이 관에 알리어 왕께서 알게 되고 그에게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 이면주의 손자되는 상뢰 또한 출천지 효자로 2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이면주의 묘소는 의당면 용암리 양촌 뒷산록에 있다. 한편 효자로 명정받을 당시의 입암문(立案文)도 보존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충청도내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올린 이면주의 효행행적을 예식원장예경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남정철(南廷哲)이 임금님께 올려 정려 내릴 것을 주청하자 임금이 정문을 내리도록 비답한 내용과, 정문을 세울 때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제공하고 그 자손들의 환상(還上) 및 제반 잡역 일체를 면제해 주도록 조치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ref>공주대학교박물관(公州大學校博物館) 공주시(公州市),1995,《공주문화유적(公州文化遺蹟)》</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