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데모크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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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일본 제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들을 묶어 일컫는 말이다.
 
정치 부분에서는 [[사이온지 긴모치#제1차 호헌운동|호헌 운동]]을 시작으로 [[보통 선거]]와 언론, 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하였고, 외교 면에서는 식민 지배와 국민 부담이 컸던 침략 [[전쟁]]의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사회면에서는 남녀 [[평등]], [[부라쿠민]] [[차별]] 철폐,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권과 파업권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문화]]면에서는 [[자유교육]]의 쟁취, [[대학]]의 [[자치권]] 쟁취운동, [[미술]] 단체들이 정형화된 [[일본 문부성|문부성]] 전람회파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 등이 나왔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운동이 자주적으로 전개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일컫는 범위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 [[가쓰라 다로]] 내각에의 반대운동부터 [[치안유지법]]의 제정까지. [[1905년]] ~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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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1911년]]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중국정세의 혼란을 틈타, 세력확장의 호기라고 판단한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는 당시 제3차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에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러일 전쟁]]에 기인한 재정난과 국제 관계의 문제를 들어 거부하였고, 우에하라는 군부대신의 현역무관제를 이용하여 천황에게 단독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음으로써, 사이온지 내각을 붕괴시키고 육군주도의 내각을 출범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가운데, 사쓰마-조슈번이 지배하던 군부(군벌)에서 조슈출신으로 육군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쓰라 타로]]의 3차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 가쓰라 타로에 대해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또 중의원 의원인 [[오자키 유키오]]와 [[이누카이 츠요시]]가 사쓰마-조슈의 번벌(藩閥) 정치로서 가쓰라 내각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1912년]] "벌족타도, 헌정옹호"의 기치를 내걸고 제1차 호헌운동이 발전되어 제3차 가쓰라내각은 조각 53일만에 총사직하였다.
 
이어서 [[입헌정우회]]를 여당으로 하는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군부대신의 현역무관제를 폐지하는 등 군부의 내각에 대한 입김을 약화시키려는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해군고관의 수뢰(收賂)사건([[지멘스 사건]])이 터지자 다시 국민의 분노로 총사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1914년]] 7월, [[사라예보 사건]]을 기화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영일 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이것으로 일본의 국제 협력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민주주의·자유주의 운동도 차츰 격화되었고, [[러시아 혁명]]과 [[독일 11월 혁명]]은 이러한 움직임에 박차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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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흐름 ==
=== 민본주의와 천황기관설 ===
1913년 이시다 토모지등은 언론잡지 "다이산테이고쿠"《{{llang|ja|第三帝国}}, "제3제국"》 등을 창간하였고, 또 [[1916년]]에는 [[도쿄 제국대학]]의 요시노 사쿠조가 민본주의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였는데, 이의 배경에는 활발하게 전개된 보통선거법 운동이 있다.
 
또한 [[미노베 다쓰키치]]가 [[천황기관설]]을 주장하여, 국가가 통치권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정당내각제를 지지하였다. 반면 [[우에스기 신키치]]는 천황주권설의 입장에서 천황기관설을 비판하였으나, 천황기관설은 의회정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헌법해석의 주요 근거로서 자주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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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 소동과 본격적인 정당내각 ===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지자,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18년 7월 12일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시베리아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수요 증가로 인한 가격 상승을 노린 상인들이 쌀을 매점하여 쌀 가격이 급등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도야마 현에서 쌀 도매상과 주민 간의 소요 사태가 순식간에 일본 전국으로 퍼져 이른바 [[쌀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쌀 도매상이 파괴되거나 불타는 등 2개월간 소요사태가 빈발하였다. 또한 전쟁 때문에 가격 상승폭이 커져 더욱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사건의 정확한 보도를 방해하여 신문사에 대한 언론 탄압 등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사태는 9월 21일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퇴하여 일단 수습되었다. 이후 "평민재상"으로 불리는 [[하라 다카시]]가 내각을 조직하여, 1918년 9월 27일 일본에서 최초로 정당 내각이 조직되었다.
 
=== 제2차 호헌운동 ===
[[1923년]] [[12월 27일]]에 발생한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의 섭정 [[쇼와 천황|히로히토 천황]] 암살 음모 사건([[도라노몬 사건|도라노몬(虎ノ門) 사건]])에 의해 당시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 대각은 총사직했다. 이후 추밀원 의장이었던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기요우라 내각은 전부 관료가 귀족원 의원중에서 선출된 내각이었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헌정옹호를 요구하는 제2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이 결과 입헌정우회, 헌정회, 혁신구락푸의 호헌3파가 연합하여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내각은 보통선거법을 제정하여 재산에 의해 제한되었던 선거권을 만 25세 이상인 모든 남자에게 부여하였다. 이로써 일본에서는 제한적 보통선거가 실현되었지만 이는 [[일본 제국]] 정부의 기만책에 불과했다. 당시 소련의 성립과 함께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지식인들 및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던 시기로 [[일본 제국]] 정부는 [[1925년]]에 [[치안유지법]]이 보통선거법과 동시에 제정되어 일본 내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사상의 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이 격화되자, [[치안유지법]]은 더욱 엄격히 개정되어 최고형을 사형으로 높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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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분류:다이쇼 데모크라시| ]]
[[분류:일본 제국의 사회 운동]]
[[분류:민주화 운동]]
[[분류:다이쇼 시대의 정치]]
[[분류:일본의 사상사]]
[[분류:가토 다카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