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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년에는 [[박언창]]을 공격하여 후사벌국을 멸망시켰다. 917년 신라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후 사벌대군 박언창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나라를 세워 자치 정권을 운영하였다.
=== 생애 후반 ===
==== [[신검견신검]]의 정변 ====
[[이훤|견훤]]은 넷째 아들 [[견금강|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의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ref>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데,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음력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