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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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에는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이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 뒤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인종과 김부식이 회유하기 위해 보낸 사절들도 죽였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 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진압군은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을 완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1136년]](인종 14)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미 식량도 사기도 떨어진 반란군은 진압군이 성으로 진입하자, 도망가기에 이르고 반란군의 수장인 [[조광 (고려)|조광]] 등이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자, 성 안의 사람들이 장수 [[최영]](崔永)을 붙잡아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