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155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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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후 ===
==== 전란 초기 활동 ====
[[충무공]] [[이순신]]의 수하로 임진왜란의 수군 장수로 복무하였으며 공로로 선무공신(3등)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인 임진년 정월에 방답진 첨사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수군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다. 1592년(선조 25) 4월 왜적이 침입해 오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부터 관하 전선 24척을 총동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5월 20일]]부터 수군 중위장, 수군 전부장으로 수군 병력을 이끌고 옥포(玉浦) 해전에서 적선 50여 척, 합포(合浦) 해전에서 적선 5척, 고성(固城) 해전에서 적선 13척, 노량(露梁) 해전에서 적선 1척, 사천(泗川) 해전에서 적선 12척을 격파하여 이순신의 신임을 받았다받았지만, 해전때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적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물론
내 머릿속에 이걸 속냐.
 
6월에는 당포(唐浦)까지 나가 적선 20여 척을 불사르고, [[경남]] [[거제도]](巨濟島)의 적 근거지로부터 적선 10여 척이 지원오는 것을 격추하였으며 당항포(唐項浦)로부터 엄호하는 적선 26척과 포구에 있는 적선 5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사살한 적이 수백명에 이르고 비단군복에 대검을 짚고 있던 적장도 1명 생포하였으며, 노획품 가운데는 적의 부장들의 결사혈진시킨 지련(祗聯)이 6권이나 되었다. [[7월]]에는 [[가덕도]], [[거제도]]에 적선을 추격하다 견내량(見乃梁)의 적선 73척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한산(閑山) 앞바다로 유인하는 일을 전담하여 끝내 적을 몰살시켰다. 연이은 승전으로 [[가덕도]]에 주둔하던 왜군은 한산도 패전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이 먼저 나가 육박하여 적선을 격침하였다. [[8월]], 적들이 위축되어 부산 앞바다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공이 선봉장이 되어 화존포(和尊浦)에서 적선 5척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서대포(西大浦)에서 8척을, 서평포(西平浦)에서 9척을 격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서도 적선 2척을 섬멸하였다. 9월에 들면서 부산 앞바다의 왜적 근거지를 섬멸하기 위한 초계(哨戒)와 탐보(探報)를 수없이 수행한 끝에 적선 5백여 척이 세 곳으로 분진(分陣)하고 있는 것을 포위전멸시키는 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적의 사기를 기습공격으로 좌절시켰으나 계속되는 기습공격으로 공의 부하들은 적의 수급을 모을 기회를 놓침으로써 공의 공적이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심하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