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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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윤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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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 술'''(宇文述, [[547년]] ~ [[617년]] [[음력 9월 21일|9월 21일]]<ref name=a>『수서』 「권4」에는 [[616년]](대업 12) 10월 기축일에 훙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묘지명이 출토되면서 오류임이 판명되었다.</ref>)은 중국 [[북주]]와 [[수나라|수]]의 장군으로, 자는 '''백통'''(伯通)이고 대군(代郡) 무천진(武川鎮) 사람이다. [[우문성 (상주국)|우문성]](宇文盛)의 아들이자 [[우문화급]](宇文化及)·[[우문지급]](宇文智及)·[[우문사급]](宇文士及) 3형제의 아버지이다.
'''우문 술'''(宇文述, [[546년]] - [[616년]])은 중국 [[수나라]]의 장군이다.자는 백통(伯通).
 
== 생애 ==
'''=== 북주에서의 생애''' ===
작지만 날래고 민첩했으며,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
'''북주에서의 생애'''
 
[[북주 무제|무제]](武帝) 때 아버지인 [[우문성 (상주국)|우문성]](宇文盛)의 전공에 의해 개부(開府)로 임명되었다.
본래 [[선비족]] 출신으로 대군(代郡) 무천(武川) 사람이며 조상의 성은 파야두(破野頭)인데 선비족 대인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의 노복이었다가 주인의 성을 따라 우문씨(宇文氏)로 고쳤다.부친은 우문성(宇文盛)으로 전공을 세워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다.
 
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좌궁백(左宮伯)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차례 승진해 영과중대부(英果中大夫)로 임명되고 박릉군공(博陵郡公)에 봉해졌다가 얼마 되지 않아 복양군공(濮陽郡公)으로 고쳐 봉해졌다.
우문술(宇文述)은 작지만 날래고 민첩했으며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 또 공손하고 삼갈줄 알며 침밀(沈密)하였다. [[북주]] 말기에 [[위효관|위효관(韋孝寬)]] 휘하에서 [[울지형|울지형(尉迟迥),]][[울지돈(尉迟惇)]]의 반란을 토벌하고 군공을 세워 상주국(上柱國) 포국공(褒國公)에 봉해지고 비단 3천필을 하사받았다.
 
[[580년]](대상 2년) [[울지형]](尉遲迥)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효관]](韋孝寬) 휘하에서 이를 토벌하고 군공을 세워 상주국(上柱國)으로 임명되고 포국공(褒國公)에 봉해졌으며, 비단 3천 필을 하사받았다.
'''수 문제 치세의 생애'''
 
'''=== 수 문제 치세의 생애''' ===
[[수 문제|양견(楊堅)]]이 북주의 [[북주 정제|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아 연호를 개황(开皇)으로 고치고 [[수나라|수(隋)]]를 건국하자 우문술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고 588년(개황 8년)에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589년(개황 9년)에는 강을 넘어 [[남조|남조(南朝)]]의 [[진 (남조)|진(陳)]]을 정벌할때 우문술은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한 뒤 삼오(三吳 :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會稽))을 평정하였다.
이듬해 [[양견]](楊堅)이 북주의 [[북주 정제|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고 [[수나라|수]](隋)를 건국하자 우문술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588년]](개황 8년)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었으며, 이듬해 [[남조]]의 [[진 (남조)|진]](陳)을 정벌할 때 우문술은 강을 넘어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한 뒤 삼오(三吳)<ref>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會稽)를 함께 일컫는 말</ref>를 평정했다.
진을 정벌한 공으로 안주총관(安州總管)이 되었다 진왕(晉王) [[수 양제|양광(楊廣)]]은 양주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우문술이 자신을 위해 양보하자 양광은 우문술을 수주총관(壽州總管)에 임명할것을 주청함으로써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진을 정벌한 공으로 안주총관(安州總管)이 되었다되었는데, 양주에 주둔하게 된 진왕(晉王) [[수 양제|양광]](楊廣)]]은 양주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우문술이 자신을에게 위해이를 양보하자 양광은 우문술을 수주총관(壽州總管)에 임명할것을임명하도록 주청함으로써,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후 우문술은 양광이 태자에 책봉되는것을 돕기위해 장안에 있는 [[양소 (544년)|양소(杨素)]]의 동생 양약(杨约)을 찾아가 뇌물을 주어 측근으로 끌어들이고 양소와 함께 양광에게 [[문헌황후|독고황후(独孤皇后)]] 앞에서는 바른 말과 행동을 보일것을 간언하였다.
 
이후 우문술은 양광이 태자에 책봉되는것을책봉되는 돕기위해것을 돕기 위해 장안에 있는 [[양소 (544년)|양소]](素)]]의 동생 [[양약]](杨约楊約)을 찾아가 뇌물을 주어주고 양소를 측근으로 끌어들이고끌어들어들였으며, 양소와 함께 양광에게 [[문헌황후|독고황후]](孤皇后)]] 앞에서는 바른 말과 행동을 보일것을보일 것을 간언하였다간언했다.
'''수 양제 치세의 생애'''
 
'''=== 수 양제 치세의 생애''' ===
양광이 즉위하자 우문술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지고 우문술의 장남 [[우문화급|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는 태복소경(太僕少卿)에 제수되었다.
[[604년]](인수 4년) 양광이 양제(煬帝)로 즉위하자 우문술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졌다.
 
양광은양제는 우문술을 총애하여총애해 그가 낸 계책은 경청하여 따랐고따랐으며, 그로 인해 우문술의 권세는 조정을 뒤흔들정도가뒤흔들 되자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졌으며 평소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뇌물을 바치니 그의 집에는 재화가 넘쳐나고 노복은 1천명에 이르게정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졌으며, 평소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뇌물을 바치니, 그의 집에는 재화가 넘쳐나고 노복은 1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612년(대업 8년) 양광이 고구려를 정벌하려하자 우문술은 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었으며 [[우중문|우중문(于仲文)]]과 함께 별동대 30만명을 거느리고 살수를 넘어 평양으로 향하던 중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계책에 빠져 수나라군은 크게무너져 2700명 만이 요서로 간신히 도망하여 돌아왔다.
 
[[612년]](대업 8년) 양광이 고구려를[[고구려]]를 정벌하려 정벌하려하자하자 우문술은 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었으며, [[우중문|우중문]](于仲文)]]과 함께 별동대 30만명을30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살수를 넘어 평양으로 향하던 중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계책에 빠져빠지고 크게 무너져 수나라군은 크게무너져2천 2700명7백 만이명만이 요서로 간신히 도망하여도망해 돌아왔다.
진노한 양광은 차마 우문술을 죽이지 못하고 그해 11월 우문술을 파직하고 서민으로 강등하였다가 613년(대업 9년) 다시 우문술을 불러들여 고구려를 재차 정벌하려하였다.
 
양제는 진노했으나, 차마 우문술을 죽이지는 못하고 관작을 삭탈해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이때 여양(黎阳)에서 [[양현감|양현감(杨玄感)]]이 수나라에 반기를 들어 거병하자 양광이 크게 놀라 6월 28일 밤중에 밀명을 내려 급하게 철군하며 우문술에게 명을 내려 군을 거느리고 하양(河阳)의 양현감을 토벌하게 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듬해에 양제가 다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자, 우문술은 관작을 돌려받고 [[양의신]](楊義臣)과 함께 두 번째로 압록강을 넘었으나, 후방인 [[여양]](黎陽)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 반기를 들고 거병하자 양제의 밀명을 받고 급히 철군했으며, [[하양]](河陽)에서 양현감의 군을 크게 깨뜨렸다.
그 공으로 우문술은 포목 수천 필을 하사받았으며 614년(대업 10년) 2월 20일 양광은 다시 조칙을 내려 세번째 고구려 원정을 떠나면서 우문술에게 명을받들어 원정에 참여하게 하니 우문술은 회원(怀远)에서 합류하였다.
 
그 공으로 포목 수천 필을 하사받았으며, [[614년]](대업 10년) 양제가 세 번째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자 대고구려 전선에 복귀해 회원(懷遠)까지 갔으나, 후에 귀환했다.
616년(대업 12년) 7월 강도(江都)에서 용주(龍舟 : 단오절에 용머리 장식을 단채 경조하는 배)를 새로 만들때 우문술은 양광을 따라 강도로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는데 얼마지나지않아 우문술은 병에 걸려 몸져눕게되었다.
 
[[616년]](대업 12년) 7월 강도(江都)에서 용주(龍舟 : 단오절에 용머리 장식을 단채 경조하는 배)를 새로 만들때만들 때 우문술은 양광을양제를 따라 강도로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는데되었으며, 얼마지나지않아이듬해<ref 우문술은name=a/> 병에강도에서 걸려 몸져눕게되었다훙했다.
이에 양광은 위씨(魏氏)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우문술을 살피게하였는데 우문술은 죽음에 이르자 양광에게 두 아들 우문화급,[[우문지급|우문지급(宇文智及)]]을 보살펴줄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우문술은 임종을 앞두고 양제에게 두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우문지급]](宇文智及)을 보살펴 줄 것을 간절히 청했으나, 이들은 훗날 양제를 시해했다.
우문술의 부탁에 양광은 눈물을 흘리며 "경의 부탁을 어찌 듣지않겠소" 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육(初六 : 초엿샛날) 우문술이 생을 마감하니 사도(司徒) , 상서령(尙書令)과 10개 군의 태수를 추증하고 시호를 " 공(恭) " 이라 하였다. 우문화급,우문지급 외에 아들 [[우문사급|우문사급(宇文士及)]]이 있었다.
 
사후 사도(司徒)·상서령(尙書令)·십군태수(十郡太守)로 추증되었으며,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가족관계 ==
 
== 가족 관계 ==
아버지 - 우문성(宇文盛)
* 증조 - 우문장수(宇文長壽) : 옥야진군주(沃野鎭軍主)
** 조부 - 우문문고(宇文文孤) : 옥야진군주
*** 아버지 - [[우문성 (상주국)|우문성]](宇文盛) : 상주국(上柱國), 대종백(大宗伯)
**** 장남 - [[우문화급]](宇文化及, ? ~ [[619년]]) :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수 양제|양제]](煬帝)를 시해한 뒤 황제를 참칭했다가 [[두건덕]](竇建德)에게 패하고 처형됨
**** 차남 - [[우문지급]](宇文智及, ? ~ [[619년]]) : 장작소감(將作少監), 형과 함께 양제를 시해한 뒤 제왕(齊王)에 봉해졌다가 두건덕에게 패하고 처형됨
**** 3남 - [[우문사급]](宇文士及, ? ~ [[642년]]) : 전중감(殿中監), 정국공(郢國公), 시호 종(縱)
 
== 참고 자료 ==
본인 - 우문술(宇文述)
* 『[[수서 (역사서)|수서]]』 「권4」·「권61」
* 『[[북사]]』 「권9」
* 『우문술 묘지명』([[625년]] 작성, [[2006년]] 출토)
 
== 각주 ==
장남 - [[우문화급|우문화급(宇文化及)]]
<references/>
 
차남 - [[우문지급|우문지급(宇文智及)]]
 
삼남 - [[우문사급|우문사급(宇文士及)]]
<br />
 
== 참고문헌 ==
《수서(隋書) 우문술 열전(宇文述 列傳)》
 
{{수말당초}}
{{토막글|중국 사람}}
 
[[분류:생년547년 미상태어남]]
[[분류:616년617년 죽음]]
[[분류:북주의 장군]]
[[분류:수나라의 상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