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변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0 개의 출처 구조, 1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10ehf1)
22번째 줄:
[[1898년]](무술년) [[4월 23일]]에 [[광서제]]는 강유위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을 지향하는 특별조치를 내리면서 소위 '무술변법'을 개시하였다. 이때 강유위의 중요한 활동은 황제에게 개혁내용을 건의하는 일이었다. 개혁 내용을 보면 '제도국' 개설, 개혁파 관리의 임용, 사민(士民)의 상서(上書) 허용, 상업진흥, 신식학교 설치와 자유로운 의복제도 등이었다.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는 '제도국' 설치는 보수적인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진전이 없었으나 [[과거제]]에서 팔고문의 폐지, [[서원]]의 학당 전환 등 몇 가지 개혁이 추진되었다.
 
강유위는 [[7월 19일]] 개혁에 방해가 되는 수구파대신의 숙청을 요청하여 예부상서를 비롯한 고급관리를 [[서태후]]의 재가도 없이 파직시켰다. 이어 [[담사동]] 등 개혁파 관리를 '군기장경'(軍機章京)으로 임명하여 제도국설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7월 27일]]에는 '제2차 개혁'을 단행하여 유명무실한 관료기구의 철폐, 제도국의 성격을 갖는 '무근전'(懋勤殿)을 개설하고 황제의 군사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친위군을 창설하여 '[[신건육군']](新建陸軍)의 창설자인 [[위안스카이]]에게 친위군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진행은 결과적으로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세력의 결속을 가져왔고, 개혁을 강행하다가는 [[광서제]]의 제위까지 위태롭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서태후]]는 수구파의 기대 속에 심복부하 [[영록]]을 임시 직례총독에 임명하여 북양육군을 장악하게 하고 변법반대의 [[쿠데타]]를 비밀리에 구체화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담사동]]은 일찍이 '강학회'의 회원이며, 신건육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수구세력을 타도하는 군사행동을 일으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곧바로 변법파를 배신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에게 밀고함으로써 변법운동은 역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