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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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가, 바로 [[메릴랜드]]로 그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돌아왔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그룹씩,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결국 수십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아주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던 터브먼(이때부터 하비루<ref>하비루는 히브리 민족 즉, [[유대인]]이라는 특정[[민족]]만 뜻하는 게 아니라 이집트 [[사회]]에서 하류층을 차지하던 [[민중]]을 뜻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이집트 왕실의 시위대장 [[보디발]] 장군의 부인은 집사신분의 [[노비]]인 요셉에게 성적인 유혹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요셉]]을 가리켜 "보디발이 데려온 히브리 종놈"이라고 부르며 멸시하였다.</ref> 를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착취와 억압에서 구원한“[[모세]]”라고 불렸다)은 “한 번도 손님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탈출한 사람들에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곤 하였지만, 그들을 돕는 게 해리엇 터브먼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도망노예법]]이 제정된 때에는, 그는 도망친 노예들을 [[캐나다]]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기도 하였다.
 
[[미국 남북 전쟁|남북 전쟁]] 발발 후, 터브먼은 [[북군|연합군]]을 위해, 처음에는 [[요리사]]이자 [[간호사]]로, 그 다음은 무장 [[정찰병]]이자 간첩으로 활약하였다. 전쟁에서 탐험대를 이끈 첫 여성이 된 그는, [[콤바히강]]을 습격하여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전쟁전쟁이 후, 그는 은퇴한끝난 후 [[뉴욕주]] [[오번 (뉴욕주)|오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노부모를 돌봤다. 병 때문에 편히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도 열심히 싸웠으며, 이후 자신의 도움으로 몇 년 일찍 세워진 흑인 양로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페렴으로 죽게 되었다.
 
== 가족과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