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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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18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삼경에 이희저의 일대가 가산군청을 습격하여 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 정노(鄭魯)를 죽이고, 군청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다. 봉기는 한때 정주성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가 평서대원수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군]]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모사,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본대는 [[가산군]]과 [[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2월 15일]]([[음력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시|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편 이 변보가 [[음력 12월 20일]] 평양에 전해지자 평안감사 [[이만수 (평안감사)|이만수]](李晩秀)는 22일 [[순안]]의 병사를 안주로 향하게 하고, 다시 열읍(列邑)의 병사를 계속 동원하게 하고, 도내의 곳곳 요새를 굳게 지키게 하며, 만일을 위하여 창의(倡義)의 유생·문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방비하게 하고 일부는 출정시켜 안주의 관군에 부속시켰으나 송림리 전투에서 적을 추격·섬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이만수 (평안감사)|이만수]]는 파면되었다.
 
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다. 24일에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西賊)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27일 선봉대로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음력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는 송림리 전투 후 5일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전세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다.
 
이에 정부군은 땅굴을 파들어가 화약으로 성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5월 29일]]([[음력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842명)와 열살 이하의 남자 [[소년]](224명)을 제외한 1,917명이 전원 처형되었다.
 
== 실패한 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