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다른 뜻}}
{{서양식 등작}}
'''황제'''(皇帝)는 [[제국]](帝國)의 세습 [[군주]]의 [[존호]]이다. 황제보다 더 높고 귀한 걋으로 신성4황졔가 있으며, 오직 보882호512민만이 유일한 신성24황졔시다. 한자의 皇帝는 두글자 모두 각각 해석하면 임금 황과 임금 제다. 즉 임금의 임금.
'''황제'''(皇帝)는 [[제국]](帝國)의 세습 [[군주]]의 [[존호]]이다. 한자의 皇帝는 임금 황과 임금 제이나, 帝(제)의 경우에는 본래 '임금'이란 뜻이 아닌 신에게 제사를 바치기 위해 차려놓은 제사장을 의미하는 한자어였다. 帝 밑의 巾(수건,건)자는 수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상 밑의 나무를 엮어 만든 선반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帝자는 본래 하늘에 드리던 제사를 뜻했지만 천자와 연관하면서 뜻이 임금으로까지 나중에 확대하게 되었다.
 
== 유래 ==
[[동양]]에서 황제는 [[진 시황제]]에게서 시작되었다. 기존 중국에서 국가원수의 호칭은 왕이었다. [[주나라]]의 [[천자]]만이 왕의 직위를 가졌고, 주변 제후들은 [[오등작]]에 따라 차등되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점차 왕을 칭하는 나라가 늘어나 모든 국가들이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진]]의 시황제는 왕과 차별화되는 칭호를 원했고, [[삼황오제]]에서 각기 황과 제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ref>《[[사기 (역사서)|사기]]》6권 진시황본기 시황 26년</ref>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제(帝)는 본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조상신을 일컫는 호칭이었으나<ref>貝塚茂樹·伊藤道治, 《中国の歴史》1권 〈原始から春秋戦国〉. 講談社, 1974</ref>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이후 황제의 약어로 사용되었다.
 
[[서양]]은 [[로마제국|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비롯한다. 그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lang|la|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서 ‘[[임페라토르]]({{lang|la|Imperator}})’는 원래 개선장군이란 뜻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변용되었고 [[영어]] ‘엠퍼러({{lang|en|emperor}})’의 어원이 되었다. ‘카이사르({{lang|la|Caesar}})’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독일어]] ‘[[카이저]]({{lang|de|Kaiser}})’와 [[러시아어]] ‘[[차르]]({{lang|ru|царь}})’로 변형되었다.<ref>Stephen Howe,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ref>
18번째 줄:
[[한국]]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皇帝)를 칭했다. 다만 제국 선포 이전에도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종종 차용하였다. 임의적으로 황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나 [[신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때가 있고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해]]는 각종 기록에서 독자 연호의 사용과 황상, [[황후]](皇后) 등의 용어가 나타나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고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 <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91 정혜공주묘지],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92 정효공주묘비]. 송기호, 〈용해구역 고분 발굴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성격〉,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0</ref>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고려 태조|태조]]와 [[고려 광종|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ref>《[[고려사]]》1권 세가 제1 태조 원년, 2권 세가 제2 광종 원년</ref>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11년</ref>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ref>《고려사》59권 지 제13 길례</ref> 임의로 황제라 부른 기록들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3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7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ref>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ref>김기덕,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관논총》vol.78, 국사편찬위원회, 1997</ref>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황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4 〈고미현서원종〉(963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22 〈운문사원응국사비〉(1147년)]</ref>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ref>[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8E%8B&searchKeywordConjunction=AND 《고려사》]</ref>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도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2년, 광종 14년</ref> 스스로도 황제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ref>〈대반야바라밀다경 사경 권수〉(952년), 이기백 편저,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 일지사, 1987</ref>
 
[[원나라]]의 [[원 간섭기|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으로 격하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왕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주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ref>《[[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 12월 17일</ref>
 
[[189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원구단에서 [[한국의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은 심화됐고, 결국 [[1910년]] [[일본 제국]]과의 [[한일 합병]]으로 제정이 폐지된다.
 
=== 일본 ===
46번째 줄: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황제도 2명이 되었다. 이 중 [[서로마 제국]]은 [[5세기]] 중후반에 멸망하면서 그 제위(帝位)가 비어 있다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800년]] 12월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후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고 [[16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습했다.
 
동쪽의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안정적으로 제위를 유지하였다. [[헤라클리우스]]황제 때부터 [[라틴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대신 [[그리스어]]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 황제)'를 칭호로 사용하였다. [[15세기]] [[루스러시아]]를 [[통일]]한 [[이반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그 정통성의 계승과 [[동방 정교회]]의 수호를 주장하며 스스로 [[차르]](Tsar)에 올랐다. 명분은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의 [[혼인]]과 [[모스크바]]로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이동한 점이었다. [[1721년]] [[표트르 1세]]는 아예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칭하였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야말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보호자이자 [[제3의 로마]]의 황제라고 주장하였으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외에도 비잔티움 제국 및 교황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제가 된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이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황제로 인정되긴 하였으나 이후 약화되면서 10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 근대 ~ 현대 ===
[[180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샤를마뉴로부터 [[위그 카페]], 그리고 자신으로 그 정통이 이어진다며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이나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 제국]]에서 황제를 자칭한 적은 있었으나 공인 받은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영국]]의 [[조지 3세]]는 [[아일랜드 왕국]]을 합병했을 때 국내의 황제 칭호 권유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나폴레옹에게 자극받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하여 전무후무한 두 개의 황제를 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해체당했지만 각지에서 황제가 난립하면서 황제 즉위의 원칙은 깨지고 그 가치도 떨어졌다. [[독일]]은 [[19세기]] 중후반 여러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된 후 [[호엔촐레른 왕가]]의 [[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라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20세기]]까지 유럽에서 제호를 썼던 나라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터키]]의 4국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모두 폐지되었고, 현재 유럽에서 제호를 쓰는 나라는쓰는나라는 없다.
 
== 서남아시아 ==
73번째 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브라간사 왕가]]가 피난오면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결국 왕실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1822년]] [[독립]]하여 남아있던 [[페드루 1세 (브라질)|페드루 1세]]를 황제에 올려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다가 [[1889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 현재의 황제 현황==
20세기를 기점으로 대한제국, 독일제국 등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 제국들이 제정폐지되어 21세기 현재 남은 황제는 [[일본]]의 [[일본 천황|천황]]뿐이다.
 
== 같이 보기 ==
* [[역대 일본 천황 목록]](BC660 ~)
* [[중국의 황제 목록]](BC200 ~ 1912)
* [[로마 황제 목록]](BC21 ~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