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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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린]]을 공격할 때는 격전 끝에 5,000명까지 감소할 정도였으나, 그 후 [[난징]]을 함락시킬 때는 태평천국군은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갖추게 되어, 수륙양면군을 편성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급격한 팽창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배경으로써 청나라 조정의 증세였다. 잇단 전쟁에 쓰이는 전비조달 및 패전 후의 피해배상을 지불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은 법에서 정한 것보다 몇 배에 달하는 세금을 특히 동남해안부의동남 해안부의 지방에서 징수했다. 거기에 [은귀전천‘은귀전천’(銀貴銭賤)]의 현상도 실질적 증세를 민중에게 강요했다. 당시 토지세는 은으로 납부하여만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전을 은으로 교환하여 납부했다. 그러나 여러 나라와의 교역으로 인해 은이 국외로 유출하는유출되는 등 은과 동전의 교환통로가교환 변동하여통로가 변동되었다. 그때까지 은 1량 = 동전 1,000문 이었던 것이 동전 2,000문 이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금의 불공평에불공평한 대해세금에 불만을 갖게 된 서민이 대거 태평천국군에 참가한 것이 급격히 팽창하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편 전쟁]]의 여파로 인해 전후 많은 비적이 횡행했는데, 이들을 태평천국이 흡수한 것도 팽창의 요인이었다. [[난징조약]]으로 인해 교역이 광동 1개 항구로 한정된 결과, 국내의 물류통로가 극변하게 되어, 이때까지 화물수송에 관련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어 비적화되었다. 또 [[향용]]이라 불린 임시모집병이 [[아편전쟁]] 후 해산되어 이들 중에도 비적화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