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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변법자강|변법운동]]과 정변 전후 광서 24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한구에서 회담을 가졌다. 점진주의를 중시하는 이토와 의기투합했고, 일본에서 코크스를 수입해 [[야하타 제철소]]에 필요한 철광석을 일본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권학편’에서 일본을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로 본받아야 하며,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일본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1909년]](선통 원년) 7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때 무덤이 파괴되고, 시신이 실종되었지만, 2007년 6월, 하북성 창주시에서 발견되었다. 최근 장지동은 재평가를 받았고, 2006년에는 장지동기념관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