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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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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당나라군을 물리치며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무열왕|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관창, 사다함과 함께 신라의 3대화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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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野合)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 [[건복]]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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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추와의 만남 ====
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 [[김용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때는 [[음력 1월 16일|정월 오기일(烏忌日)]]<ref group="주해">해는 구체적으로 몇 년도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문무왕이 태어난 [[626년]]에서 멀지 않은 이전 시점으로 여겨진다.</ref>,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
==== 백제와의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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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담의 난 ====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 장년기 ===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음력 10월|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음력 8월|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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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 ====
[[파일:Statue of Kim Yushin.jpg|섬네일|오른쪽|[[남산 (서울)|남산]]에 있는 김유신의 동상]]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가을 9월에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 부인|지소]]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 대장군 [[소정방]]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 훗날의 문무왕)과 장군 [[김진주 (신라)|김진주]] · [[김천존]]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병력만을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겸하며 통일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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