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화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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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해산후 조선중앙정부는 중앙에 [[교정청]]을 농민들은 각 고을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 하여 개혁을 추진 하였다. 전주화약이후에도 청일양국의 군대는 계속 증파되었다. 조선중앙정부는 난이 평정되었다는 사실을 양국에 알리고 철수할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의 사태를 재침약의 계기로 이용하려 한 일본은 오히려 [[한성부|한양]]을 군대로 포위한 상태에서 조선정부에 대하여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한편 청에 대해서도 협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청은 일본의 요구가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대를 꾀하려는 것임을 간파하여 이를 거절하고 공동철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도발하여서라도 청의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몰아내고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범(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떠받들어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갑오개혁]]을 간섭하였다. 한편 청에 대하여 전쟁을 도발하여 [[청일 전쟁]]이 발발 하자 농민들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봉기를 하였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의 패배, [[태인 전투]]의 패배로 지도자 격인 [[전봉준]]이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체포되었다. 비록 [[동학 농민 운동]]이 좌절되었으나 전주화약을 계기로 [[갑오개혁]]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큰 의미를 가진다.
 
== 폐정개혁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ref>{{서적 인용|제목=한국사통론|성=변태섭|이름=|날짜=|판=|출판사=삼영사|쪽=397|장=제1장 근대화의 추진}}</ref> ==
 
#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