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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화의 욕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황토현전투]])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갑오년]]). 이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청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게되고 이것을 빌미로 일본군은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같이 군사를 파견하자 이를 막기위해 농민군과 전주성에서 [[전주화약]]을 맺는다. 농민군은 [[전봉준]] 중심으로 조정에 [[전주화약|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고 조정도 중앙에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난이 진압되었다는 조정의 발표를 무시한 일본이 기습적으로 조선궁궐 [[경복궁]]을 습격해(갑오왜란) 조선 중앙조선중앙을 불법적으로 점령해점령했다. 이후 [[교정청]]을 폐지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교정청]]출신 [[김홍집]]과 친일인사로 [[갑오개혁]]을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시|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전투]]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전봉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5쪽. </ref>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난이진압되었다는 조정을 발표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갑오왜란) 고종을 협박하여 [[명성황후]] 민씨세력을 축출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교정청]]을 폐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교정청]] 출신 김홍집과 친일인사를 기용하여 친일적인 성향을 띤 [[갑오개혁]]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