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마자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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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레몽 마자랭 드 레델 마옌 느베르 추기공작'''({{llang|fr|Jules Raymond Mazarin, cardinal-duc de Rethel et de Mayenne et de Nevers}}, {{llang|it|Giulio Mazzarini|줄리오 마차리니}}, [[1602년]] [[6월 14일]] ~ [[1661년]] [[3월 9일]]) 은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의 [[추기경]], 정치가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섭정을 지냈다. [[루이 13세]]의 왕비인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추기경은 매우 각별한 관계였는데 [[프롱드의 난]] 동안 안과 마자랭 추기경이 서로 불륜 관계였다는 마자리나드(팜플렛)가 나돌았다.<ref>"마자랭의 명성과 성격"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premium.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0827a003>
[2015. 10. 30자 기사] </ref>
 
그는 [[리슐리외]] 정책을 계승하여 교묘한 외교 수완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어 [[합스부르크 가]]를 눌렀다. 내정에 있어서는 [[부르봉 왕조]] 확립에 노력하였기 때문에, 이 정책에 반대한 귀족·고등 법원은 [[파리 (프랑스)|파리]]를 중심으로,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진압하고, 봉건 세력을 억압, 절대주의 강화에 성공하였다. 또한 [[라인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에 세력을 뻗치고, [[영국]]과 동맹하여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항, [[피레네 조약]]을 승인하게 하고, 스페인 왕녀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마리아 테레사]]와 [[루이 14세]]의 결혼을 성립케 하였다.
 
문예의 보호에도 노력하고, 프랑스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마자랭 도서관을 창설하였다.
 
== 초기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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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드의 난의 한 가운데에서 마저 마자랭은 프랑스의 외교 정책을 지속적으로 지휘하였다. 그는 [[1648년]] 30년 전쟁의 종말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위한 협상들에서 중요한 일부를 맡았다. 전쟁에 시달린 유럽의 거의로 평화를 가져온 이 조약에 불구하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마자랭은 스페인과 평화를 강요하는 노력에서 [[합스부르크 가]]에 대항하는 [[독일]]의 왕자들과 [[잉글랜드]]와 제휴의 정책을 수행하였다. [[1659년]] [[피레네 조약]]의 조건들 아래 마자랭은 결국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평화에 자신의 장기적 목적을 확보하였다. [[1660년]]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공주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은 평화를 보증하였다.
 
그는 문예의 보호에도 노력하고, 프랑스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마자랭 도서관을 창설하였다.
 
== 이후의 세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