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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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1842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김영작]](金永爵)과 정부인 성씨(成氏)의 넷째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1845년에서 1848년까지 [[경상도]] [[경주시|경주]]에서 잠시 3년간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후손으로,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었다. 증조부 [[김효대]]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종조부 [[김사목]]은 [[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어머니 성씨는 우계 [[성혼]]
실학자
==== 초기 활동 ====
[[1868년]](고종 5년) [[조선의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3년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승문원부정자, 승문원박사를 겸직하고,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사퇴했다. [[1870년]] 다시 어머니 창녕성씨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더 치뤘다.
[[1875년]]에는 부사과를 거쳐 [[흥양]][[현감]]으로 나갔다가 [[1877년]]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1878년 이후 호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지냈다. 그 뒤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 일본 유람 ===
{{참고|수신사}}
[[1880년]] 여름 그는 [[윤웅렬]]
|저자=[[김삼웅]]
|제목=친일정치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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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978-89-86072-03-7}}
|페이지=37
}}</ref> 한편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
=== 귀국과 정치 활동 ===
==== 외교, 개화파 활동 ====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
|저자=임종국
|기타=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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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89-7199-036-8}}
|쪽=66~67쪽
}}</ref>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주사(陳奏使)에 진주사 [[조영하]](趙寧夏)와 함께 진주 부사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고,
[[1883년]]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 지춘추관사,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독판교섭통상사무 등을 지내면서 대외교섭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위정척사파와 지방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맹목적인 반감을 사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며 협력을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은 그의 협조 요청을 냉소적으로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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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김홍집 내각 조각 ====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
총리대신으로 그는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 2차 내각 조직과 개혁 활동 ====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갔던 강력한 친일파 박영효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1차 내각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직접 수립하여 고종으로하여금 발표하게 하였다. 이어 8아문을 7부로 고치고, 지방 8도를 23부로 바꾸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
=== 생애 후반 ===
==== 친일 의혹 ====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그러나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ref>{{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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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 미수 ====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
[[10월 8일]] 왕비가 암살당하자 김홍집은 자결하려 하였다. 때마침 김홍집을 방문했던 [[유길준]]은 그럴 필요 없다며 김홍집을 극구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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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유공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전과 개혁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참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사태만은 절대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세록지신으로 또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유공의 처지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난국이라도 극복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사명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ref name="yudong205"/>}}
=== 몰락과 최후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10-26}}
김홍집 내각에서는 일본의 압력 외에도 [[단발령]]
살해된 시신은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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