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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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열세는 내부에서 무너진 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청나라 조정의 군 재건도 주효했다. 군사는 측의 군 구조 조정도 크게 주효했다. 청나라 군사는 팔기와 녹영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지만, 시대가 내려갈수록 퇴행하면서 쓸모없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군 형태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즉, [[증국번]]의 [[상군]], [[이홍장]]의 [[회군]]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군은 지극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중시한 [[향용]]에서 탄생한 조직이었다.
 
증국번은 먼저 고향에서 자신을 스승으로 받드는 사람들을 모으고, 심지어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부하를 지연, 혈연, 학연의 관계로 모으는 형태로 군을 형성했다. 그들의 충성심은 청나라라는 국가보다 지휘관 개인에게 쏠려 있었고, 증국번의 사병 성격이 짙었다. 1854년 이후 상군은 장강 중류 지역에서 태평천국과 맞섰지만, 그들만으로는 태평천국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1862년에 이홍장에게 명하여 안휘성의 상군을 모델로 한 [[회군]]을 창건하게 했다. 이홍장의 회군은 태평천국의 난이 수습된 이후에도 상군처럼 해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북양 군벌]]로 중국 근대사에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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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용병===
태평천국은 외국인 용병 부대와도 싸워야 했다. 상해 관리와 상인들이 자금을 갹출하여 서양식 총, 대포를 갖추고 조계에 있던 외국인을 병사로 고용한 것이다. 이 용병군은 미국인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를 지휘관으로 [[양창대]]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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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에 걸쳐 태평천국은 [[양쯔강]] 유역 중류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으며, 이곳은 청나라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비옥한 땅이었기에 태평천국은 급격히 불어났다. 태평천국군은 1853년 6월 북진하여 청나라 수도 [[북경]]을 거의 점령할 뻔 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서쪽으로도 진군하여 안휘, 강소, 호북의 여러 군현을 손에 넣었다. 청나라 정규군은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대신 교착상태에 빠진 [[제1차 강남대영 공략|남경 공성]]에 집중했다. 그리고 호남성에서 [[증국번]]이 이끄는 민병대 [[상군 (청나라)|상군]]이 궐기하여 청나라 조정측에 가담해 태평천국과 싸웠다. 증국번의 [[상군 (청나라)|상군]]은 태평천국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했고, 내전의 서부전선에서 태평천국의 팽창은 중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