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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교관, 유년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가, 1905년(광무 8) 군무국으로 전출었다.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황실 시위대 기병대장, 참모국 제2과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령이 내려지자 반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군대해산령 발표 이후 만주 서간도로 가서 군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귀국,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등과 교류하였다.
 
[[1909년]] 8월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난 뒤에도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구한국군 기병대장을 거쳐 애국계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어 검거되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베이징 시|베이징]]으로 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