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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열은 그 뒤 [[대한제국]] 육군 장교 신분으로 [[노백린]]과 [[이동휘]] 등과 비밀결사 [[효충회]]를 결성해 친일파 대신의 암살을 계획했고, [[1904년]]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 평안남도 선천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종결 후 경성부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6군사령부에 파견근무하다가, 다시 대한제국 육군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교관, 유년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가, 1905년(광무 8) 군무국으로 전출었다.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황실 시위대 기병대장, 참모국 제2과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광무 9)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1907년 4윌의 [[신민회]] 창립에 창립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령이 내려지자 반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군대해산령 발표 이후 만주 서간도로 가서 군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귀국,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등과 교류하였다.
 
[[1909년]] 8월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난 뒤에도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구한국군 기병대장을 거쳐 애국계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고, 1909년 일제의 침탈을 결사 반대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 배후로배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검거되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베이징 시|베이징]]으로 망명한다.
 
=== 망명과 독립 운동 ===
망명한 뒤에는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베이징 시|베이징]]과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다가활동하였다.

그해 그는 신민회의 부회장으로 안창호 등이 참가한 중국 칭다오의 청도회담(靑島塵談)에 참석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조선총독부, 일본에 무력 항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1심에서 최고형인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 3월 13일의 2심에서는 별 혐의점이 없어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3년 석방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주로 지린 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러시아]] [[연해주]] 쌍성(雙城)에서 [[김립]](金立), 문창범(文昌範)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의 결성에 참여했다. 1918년 [[서일]](徐一)의 중광단(重光團)에 가입했고, [[1919년]] 2월 [[김좌진]],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대한독립선언서의 39인 중 한 명으로 서명에 참여했다.이후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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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추진될 때, 한성임시정부의 참모부총장, 노령 대한국민회의에서는 참모총장,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군무총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1919년]] [[8월]] 통합임시정부 설치 이후 군무부장을 지냈다.
 
1919년 7월 만주 동삼성에 있던 각 한인 독립운동 군벌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명으로 길림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독판(軍政司督辦)에 임명되어 파견, 만주내 한인 독립군 파벌의 통합운동 추진,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 1924년 4월까지 재직하였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대회(高麗共産黨大會)에 참가,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임정을 일시 떠났다. 1926년 만주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창당될 때 창당발기인으로 참가, 고려혁명당 중앙당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귀, 임정 국무위원,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대회(高麗共産黨大會)에 참가,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임정을 일시 떠났다. 1926년 4월 만주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창당될 때 창당발기인으로 참가, 고려혁명당 중앙당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귀, 임정 국무위원,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 임시정부 복귀, 광복군 참여 ===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선생은 중국 관내에서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35년 난징에서 김규식, 지청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했다. 1938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통합을 추진할 때 통합된 한국독립당에 참여,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1938년]] [[5월 6일]] [[중국]] [[창사]]의 [[남목청]]에서 [[김구]]와 함께 회의 중 전 [[고려혁명당]] 간부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39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내각 참모총장에 선출되었다. 1940년 5월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1940년]] 쓰촨 성 충칭에서 [[광복군]] 창설창군 후 광복군 참모총장으로 통수부의 막료가 되어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했다.
 
[[1945년]] 2월 [[한국독립당]]을 탈당, 홍진(洪震) 등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을 지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