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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열'''(柳東說, [[1879년]] [[3월 26일]] ~ [[1950년]] [[10월 18일]])은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만주에서 군사활동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잠시 임정 내각수반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조병옥]], [[이응준]]의 천거로 [[미 군정]] [[대한민국 국방부|통위부 부장]]을 지냈다.
 
해방 이후 한국인 부대의 첫 지휘권자였으며, 고위장교 임용은 무조건 양반 출신들만 해야 된다 하여 미군정과 갈등을 빚었다.본관은 문화, 호는 춘교(春郊)이다이고, 가명은 유동설, 유청송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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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과 독립 운동 ===
망명한 뒤에는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베이징 시|베이징]]과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망명생활 중 그는 본명 외에도 가명으로 유동설, 유청송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해 7월 그는 신민회의 부회장으로 안창호 등이 참가한 중국 칭다오의 청도회담(靑島塵談)에 참석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조선총독부, 일본에 무력 항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1심에서 최고형인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 3월 13일의 2심에서는 별 혐의점이 없어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3년 석방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주로 지린 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3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동휘, 이갑, 이강 등과 신민회 부활을 선언, 러시아 각 지역 책임자를 선출해 신민회를 재조직하였다. 그는 또 이상설, 이동휘 등과 [[권업회]]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 [[연해주]] 쌍성(雙城)에서 [[김립]](金立), 문창범(文昌範)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의 결성에 참여했다. 1918년 [[서일]](徐一)의 중광단(重光團)에 가입했고, [[1919년]] 2월 [[김좌진]],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대한독립선언서의 39인 중 한 명으로 서명에 참여했다.이후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