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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연해주]] 쌍성(雙城)에서 [[김립]](金立), 문창범(文昌範)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의 결성에 참여했다. 1918년 [[서일]](徐一)의 중광단(重光團)에 가입했고, [[1919년]] 2월 [[김좌진]],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대한독립선언서의 39인 중 한 명으로 서명에 참여했다.이후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3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원동인민위원회 위원장 크라스노체코프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병하자 1918년 7월 한인사회당엣에서 조직한 한인적위대에 참여하고, 한인적위대 지휘관으로 이만 전투에 참가하였다. 1918년 9월 4일 하바로프스크가 백러시아군에 함락되자 그는 탈출,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등과 같이 도피하던 중 9월 10일 백러시아군에 체포되어 심문과 즉결 재판을 받고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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