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 협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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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Image파일:LiHungChang.jpg|thumb섬네일|right|160px|[[리홍장]]]]
[[Image파일:F.E.Fournier.jpg|thumb섬네일|left|160px|프랑수아 에르네 프루니에]]
[[통킹]]을 속령으로 삼으려는 프랑스의 침략에 청나라가 맞서자 1883년 말에 결국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일으났다. 청나라군은 [[선떠이 전쟁]](1883년 12월) 동안 [[류융푸|유영복]]의 [[흑기군]]과 함께 싸웠다. [[아메데 쿠르베|쿠르베 제독]]이 [[선떠이]]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의 통킨 정복을 위한 길을 열었지만, 프랑스는 이제 흑기군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공세에도 대응해야 했다. 청나라를 설득해 통킹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외교적 노력에 지친 프랑스 정부는 샤를 밀로 장군으로 하여금 박닌의 성채를 공격하게 했다. 이곳은 1882년 이후 청나라 광서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다. 1884년 3월, [[박닌 전역]]을 통해 밀로 장군은 박닌을 함락하고, 청나라를 패주시켰다.
 
[[박닌]]에서 청나라의 패배는 [[선떠이]]의 함락으로 이어졌고, 청나라 조정 내 온건파의 입지를 강화시켰고,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주장하던 [[장지동]]이 주도하는 강경 청류파들의 입지를 일시적으로 실추시켰다. 게다가 1884년 봄에는 프랑스가 흥화와 [[타이응우옌]]의 함락을 성공시켰고, 이것은 서태후에게 청나라가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켰으며, 5월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협상은 [[톈진]]에서 진행되었다. 온건파 지도자인 [[리홍장]]은 청나라를 대표했고, 프랑스는 [[순양함]] 볼타(''Volta'')의 사령관인 [[프랑수아 에르네 푸니에르]]가 프랑스를 대표했다.
 
[[1884년]] [[5월 11일]]에 체결된 톈진 협약은 프랑스와 청나라 간의 무역과 교역에 관한 세부 사항을 해결하고, 베트남과의 국경 분쟁의 경계를 설정하는 포괄적인 조약이었다. 또한 그 대가로 통킹에서 청나라 군대를 철수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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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참고|후에 조약 (1884년)}}
[[1884년]] [[6월 6일]], 텐진 협약 제4조에 의해 프랑스는 베트남과의 새로운 조약(〈[[후에 조약 (1884년)|후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베트남과 안남에 대해 프랑스 보호령으로 제공하고 프랑스가 두 영토에 군대를 주둔하고, 주요 도시에 주민들을 정착하도록 허용했다.
 
1883년 8월의 징벌적 〈[[후에 조약 (1883년)|아르망 조약]]〉을 대체한 조약의 서명에는 중요한 상징적 몸짓이 수반되었다. 수십 년 전 베트남 [[자롱 황제]]가 청나라 황제에게 바친 옥새를 프랑스와 베트남 전권대사의 입회 하에 녹였다. 이것은 베트남과 청나라과의 전통적 관계 포기를 상징하는 조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