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대한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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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기 10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는 민씨 일가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개항한 이래 [[청나라|청]]-[[일본 제국|일]]-[[러시아 제국|러]] 3국의 3파전 속에서 국권(國權)을 보존하려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이완용과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로 퇴위(退威)되었고, [[1910년]]에는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다시피 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한 뒤,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 기록으로 전한다. 고종 황제 독살설은 [[3·1 운동]](전국적인 대규모 평화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08년 12월]]에 고종이고종 황제 폐하께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옥새]]가 발굴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7/2009031700338.html# |제목=고종 황제가 사용한 옥새 발굴 |확인날짜=2009-03-1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405273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7/2009031700338.html# |보존날짜=2013-10-24 |깨진링크=예 }}</ref>
 
[[2009년]] 일본 국회 헌정(憲政)자료실에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이“고종황제폐하가 즐겨 마셨던 식혜에 독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ref name=":0">[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7/2009022701131.html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2009년 2월 28일 [[조선일보]]</ref><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823010323300740010 “고종, 늑약 확인 거부땐 독살” 조선총독에 밀명] 2010년 8월 23일 [[문화일보]]</ref>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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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small>음력 8월 21일</small>]]) 일본은 [[운요호 사건]](군사 도발)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압박하고, 결국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ref name="고종시대">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ref>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small>음력 2월 3일</small>]])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ref name="고종시대">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ref>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신식 군대)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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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1893년 고종은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고, 영국인 대위 콜웰(William H. Callwell)과 하사관 커티스(James Curtis)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강화도에 최초의 근대적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했다. 통제영학당은 사관생도 50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여, 영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br />
====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
[[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140px|왼쪽|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1890년]] 한때 [[흥선대원군]]가의 식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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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ref name="고종시대" />
 
==== 대한제국의대한제국 성립 ====
===== 대한제국 선포 =====
[[파일:Portrait of Gojong 01.jpg|섬네일|왼쪽|200px|고종 황제의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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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Portrait of Emperor Gojong-01.jpg|섬네일|190px|예복을 갖춰 입은 고종]]
[[파일:Imperial banner of Korea.svg|섬네일|190px|고종 황제의 깃발인 《대한황제폐하몸기》]]
[[파일:고종.JPG|섬네일|[[선글라스]]를 쓰고있는 고종|191x191픽셀]]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 '광무제'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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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용의 쿠데타 기도 =====
1899년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를쿠데타(고종의 정부을 전복하는 것)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 [[동학농민운동|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면 이번 쿠데타에 이준용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이었다. 그 해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파일:Leejunyong1917.jpg|섬네일|왼쪽|160px|조카이자 정적인 이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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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용의 엄상궁의 귀비, 왕비 책봉 반대운동 =====
[[파일:엄귀비 양장사진.jpg|섬네일|150px|왼쪽|[[후궁 순헌황귀비]] 엄씨, [[의민태자|영친왕]]의 생모이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순헌황귀비|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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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일본과의 갈등 =====
[[파일:Korean Emperor Kojong and Crown Prince Yi Wang.jpg|섬네일|왼쪽|201x201px300px|고종과 황태자 시절의 순종]]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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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에 있는 주변 시내를 장악하고 군대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군대가 해산]]이 된다.<ref name="고종시대" />
[[파일:Gojong of the Korean Empire.jpg|200px|섬네일|독일 군사 유니폼(1904)]]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ref name="고종시대" />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 을사 늑약 전후 =====
[[파일:Itô Hirobumi.jpg|섬네일|왼쪽|150px|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참고|을사보호늑약}}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조선 고종|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조선 고종|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ref>제2차 한일 협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8/005000000200408271743670.html 〈‘을사조약 중명전’ 버려진 역사〉], 한겨레, 2004.8.27.</ref>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조선 고종|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파일:Itô Hirobumi.jpg|섬네일|왼쪽|150px|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파일:Gojong of the Korean Empire.jpg|223x223px|섬네일|독일 군사 유니폼(1904)]]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조선 고종|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조선 고종|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ref name="망언뿌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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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 [[강원도]] [[삼척군]]과 [[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파일:Eulsa retraction.jpg|섬네일|오른쪽|221x221px350px|영국에 전달된, 제2차 한일 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호머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ref>
더글라스스토리 , 《고종황제의밀서》(글내음, 2004년)</ref> 고종의 무효선언 발표는 훗날 [[대한민국]]에서 [[을사조약]]의 무효, 불법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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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고종은 [[1907년]]에 [[이준 (1859년)|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하여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로 인한 외교권이 강제로 박탈된거에 대해 항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통감은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다는 구실로 고종을 압박하여 [[1907년]] [[7월 19일]] [[고종 양위 사건|양위식]](고종의 강제 퇴위)으로 황권이 황태자 척에게 양위당하고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이 헤이그에 보냈던 특사 헐버트에게 비밀리에 자신이 상해의 덕화은행에 맡긴 예치금을 찾아오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고종의 내탕금은 일본에 의해 이미 사라지고 난 뒤었다.
 
==== 일본의 침략과 강제 퇴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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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초기 ====
[[파일:Gojong of the Korean Empire 01.jpg|섬네일|오른쪽|315x315px200px|서양식 제복 차림의 고종 광무 태황제(1910년대로 추정)]]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고종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의 작위를 받고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고종 이하 흥친왕, 의친왕, 영친왕, 영선군 등이 [[일본]]제국의 황족 자격으로 황적에 편입되었다. 일부 일본 극우 귀족이 망국의 황족을 황족으로 대우해야 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자 [[메이지 천황]]은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 황족 가의 딸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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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5월]]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그는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일본 황적에 올리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장관 모두 덕혜는 사생아이므로 황적에 올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성대한 백일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나 [[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일본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덕혜옹주]]로 하여금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 최후 ====
[[파일:Death of Korean Emperor Kohjong.jpg|섬네일|왼쪽|179x179px140px|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죽었다.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자살설, 그날 식혜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그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사실 무근이라는 반론도 있다.
 
{{인용문|고종황제가 [[의민태자|이 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1)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의민태자|왕세자]]의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한일합방|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br />
 
{{인용문|고종황제가 [[의민태자|이 왕세자]]와 [[이방자|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의민태자|왕세자]]의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한일합방|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한편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독살설을 불신했지만 궁궐에 출입하던 인사들을 만나면서 독살설 쪽으로 심증을 굳히게 된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이는 [[김규식]]의 편지서신과 함께 [[3·1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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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파일:Funeral for Gojong.JPG|섬네일|250x250픽셀|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ref name="yun1" />했다고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ref name="yun1" /> 고 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한편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이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수뇌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1919년]]에 개최되는 [[파리 강화회담|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합병의 부당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데라우치 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고종으로 하여금 1905년의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여 독살하였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와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와 같은 관료들에게 고종 독살에 대한 풍문을 묻기도 하였다.<ref name=":0" />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ref name="yun1"/> 고 했다.
{{인용문|"(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br><br>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i>1919년 10월 26일}}
 
== 이문용 관련 ==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ref name="yun1"/> 고 했다.
이문용(李文鎔)은 스스로를 고종과 상궁 염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라고 주장하는 인물로, 검증된 바가 없으며 관련 기록도 전무하다. 소설가 유주현이 이문용을 고종의 딸로 묘사한 장편소설 《황녀》를 발표하고, 1974년 같은 제목의 MBC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드라마 때문에 황녀로 알려지자 1975년부터 전주 [[경기전]] 내 조경묘 수직사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황실 구성원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과 《[[승정원일기]]》에서 조차 기록이 없는 이문용을 고종의 친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했던 상궁도 이문용의 존재를 부정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문용 할머니 타계뒤도 시비 재연|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4010032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4-01&officeId=00032&pageNo=7&printNo=1277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7-04-01|저자=유인석}}</ref>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 사후 ==
이문용(李文鎔)은 고종과 상궁 염씨 사이에서 본인이 태어났다고 주장하였지만 검증된바 없으며 관련 기록도 전무하다. 소설가 유주현이 이문용을 고종의 딸로 묘사한 장편소설 《황녀》를 발표하고, 1974년 같은 제목의 MBC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드라마 때문에 황녀로 알려지자 1975년부터 전주 [[경기전]] 내 조경묘 수직사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황실 구성원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과 《승정원일기》에서조차 기록이 없는 이문용은 고종의 친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하여 있던 상궁도 이문용의 존재를 부정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문용 할머니 타계뒤도 시비 재연|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4010032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4-01&officeId=00032&pageNo=7&printNo=1277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7-04-01|저자=유인석}}</ref>
 
== 가족 관계 ==
[[파일:대한제국 황실 가족사진.JPG|섬네일|오른쪽|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class="wikitable"
! rowspan="2" |조선 제26대 국왕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 rowspan="2" |[[파일:Gojong of the Korean Empire 01.jpg|275x275픽셀]]
'''   고종 태황제'''
 
   高宗 太皇帝
!출생
|'''[[1852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small>음력 7월 25일</small>]])
{{국기|조선}} [[한성부]] [[운현궁]] 사저
|-
!사망
|'''[[1919년]] [[1월 21일]] (66세)'''
{{국기|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
 
=== 부모 ===
{{참조|흥선대원군#가족 관계|틀:운현궁 가계도|설명=사친 조부 흥선대원군 가계의 관련내용은}}
{| class="wikitable"
!
!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
|양부
| [[조선 문조|문조 익황제]]
 文祖 翼皇帝
|[[전주 이씨|전주]]
|1809년 - 1830년
|[[조선 순조|순조 숙황제]] <small>純祖 肅皇帝</small>
[[순원왕후|순원숙황후]] 김씨 <small>純元肅皇后 金氏</small>
|조선의 추존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
|양모
| [[신정왕후 (조선)|신정익황후]] 조씨
 神貞翼皇后 趙氏
|[[풍양 조씨|풍양]]
|1808년 - 1890년
|풍은부원군 [[조만영]] <small>豊恩府院君 趙萬永</small>
 
* 양부 : [[조선 문조|문조익황제]] 이영(文祖翼皇帝 李旲) (효명세자)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 <small>德安府夫人 恩津 宋氏</small>
* 양모 : [[신정왕후 (조선)|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sup>풍양 조씨</sup>
** 형 : [[조선 헌종|헌종성황제]] 이환(憲宗成皇帝 李奐)
** 형수 : [[효현왕후|효현성황후]] 김씨(孝顯成皇后 金氏)<sup>안동 김씨</sup>
** 형수 : [[효정왕후|효정성황후]](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孝定成皇后 洪氏)<sup>남양 홍씨</sup>
* 친부 : [[흥선대원군|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興宣獻懿大院王 李昰應)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친모 :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順穆大院妃 閔氏) <sup>여흥 민씨</sup>
** 친형 : [[흥친왕]] 이희(興親王 李熹)
** 이복형 :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ref>추대 음모 사건에 연루, 사사됨</ref>
* '''고종태황제 이희(光武太皇帝 李熙)''' (연호: [[광무]]) - [[대한제국]] 초대 황제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sup>여흥 민씨</sup>
** 2황자 (1871년 11월 4일 ~ 1871년 11월 8일) : 원자, 4일 만에 사망
** 2황녀 (1873년) : 222일 만에 사망
** 3황자 (1874년~1926년) : 대한제국 제2대 황제 [[대한제국 순종|순종효황제]] 이척(純宗孝皇帝 李坧)
** 4황자 (1875년) : 13일 만에 사망
** 6황자 (1878년) : 105일 만에 사망
* 후궁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1911년)<sup>영월 엄씨</sup>
** 7황자 (1897년~1970년) : [[의민황태자]] 이은(懿愍皇太子 李垠)
*** 손자 (1931년~2005년) : [[회은황태손]] 이구(懷慇皇太孫 李玖)
* 후궁 : [[귀인 이씨 (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순아(永寶堂貴人 李順娥, 1843년~1928년)
** 1황자 (1868년~1880년) : [[완친왕]] 이선(完親王 李墡), 완효헌왕(完孝憲王), 완화군(完和君) - 조졸
** 1황녀 (1871년~1872년) : 조졸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sup>덕수 장씨</sup>
** 5황자(1877년~1955년) :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 손자 : [[이갑 (황손)|이갑]](李鉀)
**** 증손 : [[황사손 이원|이원]](李源) → [[회은황태손]] 이구(皇太孫 李玖)의 양자로 출계
* 후궁 : [[귀인 이씨 (광화당)|광화당 귀인]] 이완흥(光華堂貴人 李完興, 1885년~1967년)
** 8황자 (1914년~1916년) : [[이육 (1914년)|이육]] (李堉) - 조졸
* 후궁 : [[귀인 정씨 (보현당)|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 1882년~1943년)
** 9황자 (1915년~1916년) : [[이우 (1915년)|이우]](李堣,) - 조졸
* 후궁 : [[내안당|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 1847년~1914년)
** 3황녀 (1879년~1880년) : 조졸
* 후궁 : [[귀인 양씨|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 1882년~1929년)
** 4황녀 (1912년~198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
* 후궁 : [[삼축당 김씨|삼축당 상궁]] 김옥기(三祝堂尚宮 金玉基, 1890년~1970년)
* 후궁 : [[정화당 김씨|정화당 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효유왕대비 <small>孝裕王大妃</small>
효유대왕대비 <small>孝裕大王大妃</small>
|-
!생부
|[[파일:Heungseon Daewongun Portrait.jpg|200x200픽셀]] [[흥선대원군]] 이하응
 興宣大院君 李昰應
|전주
|1820년 - 1898년
|[[남연군]]<ref>[[조선 효종|효종]]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에게 입적</ref> <small>南延君</small>
 
군부인 [[여흥 민씨]] <small>驪興 閔氏</small>
|헌의대원왕 <small>獻懿大院王</small>
|-
!생모
| [[여흥부대부인]] 민씨
 驪興府大夫人 閔氏
|[[여흥 민씨|여흥]]
|1818년 - 1898년
|[[민치구]] <small>閔致久</small>
[[전주 이씨]] <small>全主 李氏</small>
|순목대원비 <small>順穆大院妃</small>
|}
<br />
 
=== 황후 ===
{| class="wikitable"
! rowspan="2" |황후
!시호
!이름
!본관
!출생
!사망
!부모
!비고
|-
|[[명성황후|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閔氏
|자영<ref name="empr p20">《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20쪽.</ref>玆暎
|[[여흥 민씨|여흥]]
|[[1851년]] [[11월 17일]]
 ([[음력 9월 25일|<small>음력 9월 25일</small>]])
|[[1895년]] [[10월 8일]] (43세)
  (<small>[[음력 8월 20일]]</small>)
|여성부원군 [[민치록]] <small>驪城府院君 閔致祿</small>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small>韓昌府夫人 韓山 李氏</small>
|
*[[을미사변]]으로 암살
*[[광무 (연호)|광무]] 원년(1897년) 황후로 추존
|}
 
=== 후궁 ===
{| class="wikitable"
!
!
!이름
!본관
!출생
!사망
!비고
|-
|귀비
|[[파일:Princess Consort Sunheon.JPG|260x260픽셀]]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선영 善英
|[[영월 엄씨|영월]]
|[[1854년]] [[2월 2일]]
 ([[음력 1월 5일|<small>음력 1월 5일</small>]])
|[[1911년]] [[7월 20일]] (57세)
|
|-
| rowspan="6" |귀인
|  [[귀인 이씨 (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씨
  永寶堂 貴人 李氏
|순아 順娥
|
|[[1849년]]
|[[1928년]] [[12월 17일]]<ref>{{인용문|순종의형님되시는이를나흐신 완왕궁 리귀인(完王宮李貴人)은팔십세의로령으로 지난십칠일 정오에별세하얏더라|동아일보 1928.12.19<nowiki><ref></nowiki>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21900209202028&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2-19&officeId=00020&pageNo=2&printNo=2990&publishType=00020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ref>}}<nowiki></ref></nowiki> (80세)
|
|-
| colspan="2" |   [[귀인 장씨]]
   貴人 張氏
|[[덕수 장씨|덕수]]
| colspan="2" |       ''생몰년 미상''
|
|-
| colspan="2" |  [[내안당|내안당 귀인]] 이씨
  內安堂 貴人 李氏
|
|[[1847년]]
|[[1914년]] [[2월 13일]]<ref>《순종실록부록》 7년(1914) 2월 13일 1번째 기사</ref>
|
|-
|  [[귀인 이씨 (광화당)|광화당 귀인]] 이씨
  光華堂 貴人 李氏
|완덕 完德
|
|[[1887년|1885년]]
|[[1970년|1967년]] [[11월 10일]]<ref>{{뉴스 인용|url=http://m.blog.daum.net/aroma-may/8357753|제목=1967년 11월 10일, 고종 후궁 광화당 이씨(光華堂 李氏) 별세|성=|이름=|날짜=|뉴스=Daum블로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ref> (82세)
|
|-
| colspan="2" |  [[귀인 정씨 (고종)|보현당 귀인]] 정씨
  寶賢堂 貴人 鄭氏
|[[해주 정씨|해주]]
|[[1882년]]
|[[1943년]]
|
|-
|[[파일:복녕당 귀인 양씨.jpg|257x257픽셀]]
  [[귀인 양씨|복녕당 귀인]] 양씨
 
  福寧堂 貴人 梁氏
|춘기 春基
|[[충주 양씨|충주]]
|[[1882년]] [[9월 27일]]
|[[1929년]] [[5월 30일]]<ref>《동아일보》, 1929년 6월 1일</ref> (46세)
|
|-
| rowspan="2" |상궁
|   [[삼축당 김씨|삼축당]] 김씨
   三祝堂 金氏
|옥기 玉基
|[[안동 김씨|안동]]
|[[1890년]]
|[[1970년]] [[9월 23일]]<ref name="경향">[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92400329207004&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9-24&officeId=00032&pageNo=7&printNo=7684&publishType=00020 고종황제 마지막 후궁 삼축당김씨 별세] 《경향신문》, 1970년 9월 24일</ref> (80세)
|
|-
| colspan="2" |   [[정화당 김씨|정화당]] 김씨
   貞和堂 金氏
|안동
| colspan="2" rowspan="4" |       ''생몰년 미상''
|
|-
| rowspan="3" |궁인
| colspan="2" |   궁인 서씨
 
   宮人 徐氏
| rowspan="3" |''미상''
|
|-
| colspan="2" |   궁인 김씨
 
   宮人 金氏
|
|-
| colspan="2" |   궁인 장씨
 
   宮人 張氏
|
|}
 
 
=== 황자 ===
{| class="wikitable"
!
! colspan="2" |이름
!출생
!사망
!생모
!배우자
!비고
|-
|1
|  [[완친왕]] 完親王
   <small>완화군 完和君</small>
|선 墡
|[[1868년]] [[5월 31일]]
|[[1880년]] [[1월 12일]] (11세)
|영보당 귀인 이씨
|''     미혼''
|서장자
|-
|2
| colspan="2" |''      대군''
|''1871년 11월 4일''
|''1871년 11월 8일''
| rowspan="4" |명성황후 민씨
|
|[[항문 폐쇄증|쇄항증]]으로 사망
|-
| rowspan="2" |3
! rowspan="2" |[[파일:Emperor Sunjong.jpg|253x253픽셀]]
 
 
[[대한제국 순종|순종 효황제]]
 
純宗 孝皇帝
| rowspan="2" |척 坧
| rowspan="2" |[[1874년]] [[3월 25일]]
  ([[음력 2월 8일|<small>음력 2월 8일</small>]])
| rowspan="2" |[[1926년]] [[4월 25일]] (52세)
|  [[순명효황후]] 민씨
  純明孝皇后 閔氏
! rowspan="2"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
|[[파일:Empress Sunjeong of the Korean Empire.jpg|239x239픽셀]]
  [[순정효황후]] 윤씨
 
  純貞孝皇后 尹氏
|-
|4
| colspan="2" |''      대군''
|''1875년 4월 5일''
|''1875년 4월 18일''
|
|
|-
|5
|[[파일:Prince Imperial Ui.jpg|테두리|229x229픽셀]]
   [[의친왕]] 義親王 
 
   <small>의화군 義和君</small>
|강 堈
|[[1877년]] [[3월 30일]]
|[[1955년]] [[8월 16일]] (78세)
|귀인 장씨
|[[파일:의친왕비.jpg|228x228픽셀]]
  [[의친왕|의친왕비]] 김수덕
 
  義親王妃 金修德
|
|-
|6
| colspan="2" |''      대군''
|''1878년 2월 18일''
|''1878년 6월 5일''
|명성황후 민씨
|
|
|-
|7
|[[파일:Crown Prince of Korea Yi Un.jpg|239x239픽셀]]
 [[의민황태자]] 懿愍皇太子
 
   <small>영친왕 英親王</small>
|은 垠
|[[1897년]] [[10월 20일]]
|[[1970년]] [[5월 1일]] (72세)
|순헌황귀비 엄씨
|[[파일:Yi Bangja.jpg|241x241픽셀]]
 [[이방자|의민황태자비]] 이방자 
 
 懿愍皇太子妃 李方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
|8
|[[파일:이육 왕자.jpg|196x196픽셀]]
   [[이육 (1914년)|왕자 이육]]   
 
   王子 李堉
|육 堉
|[[1914년]] [[7월 3일]]
|[[1916년]] [[1월 22일]]<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901022_001|제목=왕자 이육이 죽다|저자=순종실록부록|날짜=1916-01-22|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ref>
|광화당 귀인 이씨
|
|
|-
|9
|[[파일:이우황자.jpg|166x166픽셀]]
   [[이우 (1915년)|왕자 이우]] 
 
   王子 李堣
|우 堣
|[[1915년]] [[8월 20일]]
|[[1916년]] [[7월 25일]]<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907025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6%9D%8E%E5%A0%A3|제목=왕자 이우가 죽다|저자=순종실록부록|날짜=1916-07-25|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ref>
|보현당 귀인 정씨
|
|
|}
 
=== 황녀 ===
{| class="wikitable"
!
!
!이름
!출생
!사망
!생모
!배우자
!기타
|-
|1
| colspan="2" |''      옹주''
|''1871년''
|''1872년''
|영보당 귀인 이씨
|
|
|-
|2
| colspan="2" |''      공주''
|''1873년 2월 13일''
|''1873년 9월 28일''<ref>《[[고종실록]]》 10권, 고종 10년 1873년 조선 개국(開國) 482년 9월 28일 계유 1번째기사
 
''공주가 졸서하다''</ref>
|명성황후 민씨
|
|
|-
|3
| colspan="2" |''      옹주''
| colspan="2" |''        미상''
|내안당 귀인 이씨
|
|
|-
|4
|[[파일:Princess Deokhye 02.jpg|224x224픽셀]]
   [[덕혜옹주]]   
 
   德惠翁主
|덕혜 德惠
|[[1912년]] [[5월 25일]]
|[[1989년]] [[4월 21일]] (76세)
|복녕당 귀인 양씨
|[[파일:Takeyuki so, 1931.JPG|191x191픽셀]]
 
 
   [[소 다케유키]]  
 
    宗武志
|
|}
<br />
== 외국인의 평가 ==
=== 긍정적인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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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ref name="코리언레퍼">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9-102쪽.</ref> 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ref name="코리언레퍼" />
 
=== 부정적인 평가 ===
==== 정치적 능력 ====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ref name="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
 
[[미국]]의 언론인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 [[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 [[11월 25일]]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ref name="고종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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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반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즉위 중반에는 민비([[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과 즉위 후반에는 민비가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때 그의 신하였던 [[윤치호]]는 '용모가 상당히 출중했다.<ref name="yun11">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68페이지</ref>'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의 [[찰스 1세]]와 비슷하다.<ref name="yun11" />'고 평가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윤치호 일기]]에서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그런 나라의 임금이면서도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며, [[유교]]적 기준에 의하면 고종은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 암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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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수시로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민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ref name="hwang35">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35쪽</ref>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나 매과(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까지 기승을 부렸다<ref name="hwang35" />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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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광무 (연호)}}
 
* [[1896년]] [[1월 1일]]부터는 [[태양력]]을 사용함.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color:#ffffff;text-align:center"
|- style="background-color:#cccccc;font-weight:b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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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br />(干支)||[[갑오]]<br />(甲午)||[[을미]]<br />(乙未)||[[병신]]<br />(丙申)||[[정유 (간지)|정유]]<br />(丁酉)||[[무술 (간지)|무술]]<br />(戊戌)||[[기해]]<br />(己亥)||[[경자]]<br />(庚子)||[[신축]]<br />(辛丑)||[[임인]]<br />(壬寅)||[[계묘]]<br />(癸卯)||[[갑진]]<br />(甲辰)||[[을사]]<br />(乙巳)||[[병오]]<br />(丙午)||[[정미]]<br />(丁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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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br />(年號)||[[개국 (조선)|개국]]<br />(開國)<br />503년||504년||[[건양]]<br />(建陽)<br />원년||2년<br />[[광무 (연호)|광무]]<br />(光武)<br />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11년<br />[[융희]]<br />(隆熙)<br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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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조선)|개국]]<br />(開國)<br />5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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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화재 ==
 
== 관련 문화재 ==
*[[신축진연도병]] - 1901년 7월 고종황제의 오순을 기념하여 거행된 진연을 그린 8폭의 병풍이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되었다
* [[신축진연도병]] - 1901년 7월 고종황제의 오순을 기념하여 거행된 진연을 그린 8폭의 병풍이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 1902년 세워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한 비석이다. 사적 171호이다.
*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 1902년 세워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한 비석이다. 사적 171호이다.
 
== 고종이 등장한 작품 ==
=== 영화 ===
* [[김승호]] - [[1959년]] 《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 [[김승호남궁원]] - [[1959년1964년]] 《고종[[청일전쟁과 황제와 의사 안중근여걸민비]]
* [[남궁원허선행]] - [[1964년2004년]] 《[[청일전쟁과도마 안중근 (영화)|도마 여걸민비안중근]]》
* [[허선행김상중]] - [[2004년2006년]] 《[[도마 안중근한반도 (영화)|도마 안중근한반도]]》
* [[김상중김영민]] - [[2006년2009년]] 《[[한반도불꽃처럼 (영화)|한반도나비처럼]]》
* [[김영민조재현]] - [[2009년2010년]] 《[[불꽃처럼 나비처럼인플루언스]]》
* [[조재현박희순]] - [[2010년2012년]] 《[[인플루언스가비 (영화)|가비]]》
* [[박희순조용진]], [[함원진]] - [[2012년2015년]] 《[[가비 (영화)|가비도리화가]]》
*[[조용진]], [[함원진백윤식]] - [[2015년2016년]] 《[[도리화가덕혜옹주 (영화)|덕혜옹주]]》
*[[백윤식]] - [[2016년]] 《[[덕혜옹주 (영화)|덕혜옹주]]》
 
=== 드라마 ===
 
* 《[[대원군 (1972년 드라마)|대원군]]》 [[MBC TV|MBC]], [[1972년]], 배우: [[송재호]]
* 《[[민비 (드라마)|민비]]》 [[MBC TV|MBC]], [[1977년]], 배우: [[정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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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 ===
* [[국수호]] - [[1994년]] 무용극 [[명성황후 (무용극)|명성황후]]
 
* [[국수호조성하]] - [[1994년2007년]] 무용극 [[명성황후 (무용극)|명성황후]]
*[[조성하]] - [[2007년]] 무용극 [[명성황후 (무용극)|명성황후]]
 
=== 연극 ===
* [[강신일]] - [[2010년]] 연극 [[나는 너다 (연극)|나는 너다]]
 
*[[강신일]] - [[2010년]] 연극 [[나는 너다 (연극)|나는 너다]]
 
=== 뮤지컬 ===
 
* 뮤지컬 2007년 《[[명성황후 (뮤지컬)|명성황후]]》 조승룡
* 가무극 2013년 《잃어버린 얼술 1895》 [[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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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 《고종실록》 = [http://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 고종태황제실록》]
* 《일성록》
* [http://sjw.history.go.kr/ 《승정원일기》]
* {{글로벌세계대백과2|저자=|제목=개화정책과 그 반향}}
* 《고종시대의 재조명》 = {{서적 인용
|저자=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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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references />
 
== 외부 링크 ==
* [https://web.archive.org/web/20060403033806/http://rfo.co.kr/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https://web.archive.org/web/20060403033806/http://rfo.co.kr/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조선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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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
{{기본정렬:고종}}
[[분류:대한제국 고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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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제국 순종]]
[[분류:19세기 한국의 군주]]
[[분류:20세기 한국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