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대한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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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부터 즉위 전 ===
==== 출생과 가계 ====
고종은 1852년,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부대부인|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 [[조선 인조|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남연군은 [[조선 영조|영조]]의 법적 증손자가 되어 순조와[[조선 태조|순조]]와 동항렬이 되었으며, 아버지인 흥선군은 익종과[[조선 문조|익종]]과 동항렬이 되고 고종은 헌종과[[조선 헌종|헌종]]과 동항렬이 되었다.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본관이 [[여흥 민씨|여흥]]이며,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민치구]]의 딸이며 훗날 고종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되어 양오라버니가 되는 [[민승호]]와, [[임오군란]] 때 참살당하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흥친왕|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선 정조|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지고 [[조선 철종|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회평군과[[이원경 영평군의(1827년)|회평군]]과 [[영평군 (1828년)|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흥선대원군|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이 있었으므로 흥선군은 익종 비 [[신정왕후 (조선)|신정왕후 조씨]]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조선 문조|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조선 헌종|헌종]]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사가 없던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조건을 수용하고 결탁을 한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승하 뜨자하자, 흥선군과 [[신정왕후 (조선)|대왕대비 조씨는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면을 익종의[[조선 문조|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 왕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 즉위 초반 ===
==== 흥선대원군의 섭정 ====
국왕의 생부로서 섭정한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김씨]]를 비롯한 벌열들을 가급적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기구로서 의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던 [[비변사]]를 폐지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비변사가 갖고있던 정치, 군사적 기능을 양분하였다.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철폐하고, 그 외 붕당의[[붕당]]의 근거지이고,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 [[서원 철폐|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는데, 최익현을[[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서원 철폐]]의 강한 의지를 내비추었다.  
 
이어 [[양전 사업|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삼정의 문란|군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각 관청이 맡은 일과 세칙을 정리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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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 사건|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평양 지역민과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5년후인 1871년에 발생하는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1866년 9월, 프랑스의 [[피에르귀스타브 로즈|로즈 제독]]은 군대를 이끌고 [[병인양요|강화도를 침략]]하였으나 [[김포 문수산성|문수산성]]과 [[강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에게 격퇴당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외규장각 도서|관련 유물들을 약탈하였다]].(→[[병인양요]])
 
[[1868년]]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묘|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남연군]]의 시신을 두고 협상하려 하였으나 회곽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묘지를 파지 못하고 실패에 그쳤다.([[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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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
{{인용문|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br>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br>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br>이를 자손 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척화비}}<br />
=== 친정과 재위 기간 ===
==== 친정강화도 초반조약과 개항 ====
[[1869년]] [[1월 31일]](<small>[[1868년]] [[음력 12월 19일]]</small>)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정부는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부산)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 개항과 친정 =====
[[1869년]] [[1월 31일]]([[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부산)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부산)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군사 도발)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압박하고, 결국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ref name="고종시대">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ref>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small>음력 8월 21일</small>]]) 일본은 [[운요호 사건]](군사 도발)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압박하고, 결국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small>음력 2월 3일</small>]])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불평등 조약]체결한 후체결함으로서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ref name="고종시대">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ref>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신식 군대)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성립 난 뒤부터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세계 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전개하였고 이러한 노선에이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고종은 고종이군제개혁에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신식신식군대인 군대)을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연마하게 했다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11월 4일]]([[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 임오군란과 청의 내정 간섭과 갈등내정간섭 =====
[[파일:Emperor Gojong of the Korean Empire by Percival Lowell, 1884.png|304x304px|섬네일|1884년의 고종.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고종 최초의 사진.]]
[[파일:Yuan Shikai in uniform.jpg|섬네일|왼쪽|130px|[[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
 
[[1882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군인들의 불만으로 촉발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는데, 이러한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 [[여흥 민씨|민씨 척족]]과 [[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군인들은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이미 [[장호원읍|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이는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였음).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에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2년]]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임오군란흥선대원군]]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10년만에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이는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였음). 그러나 청나라의[[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청나라는 뒤로부터고문관을 청나라의파견하여 간섭을조선의 받게내정에 된다간섭하였는데, 마젠창과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 [[위안스카이]] 등이 파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 조약|제물포조약]])
 
또한 청나라와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의 외교 고문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이름했다명명했다.<ref name="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32570383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조선일보 2004.03.25</ref>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미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였는데, 이 때 처음으로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제정했고, 이듬해 3월 6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했다.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왔다. 1883년 최초의 근대적 국가 기술 표준 기관인 전환국 소속 분석시험소를 설립하고 화폐의 주조 및 금속광물의 분석ㆍ가공ㆍ제련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ref>1883년(고종 20년)에 설립한 전환국 소속 분석시험소는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어, 대한민국 [[국가기술표준원]](KATS)으로 이어졌다. 국가기술표준원은 KS 표준을 정하는 국가 기관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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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 갑신 정변 전후이후 ====
{{참고|갑신정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small>음력 10월 17일</small>]])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등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켜 온건적인 개화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이궁시켜 14개조 정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12월 6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일본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된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부마]])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명성황후]]의 외교 군권으로 조종하는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1885년]],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던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를 [[거문도 사건|불법 점령]]하였다. 영국군은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설치하였으며 섬의 이름을 포트해필턴이라 명명하고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중재로 1887년 철수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유길준]]과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자는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불법 점령하는 사건([[거문도 사건]],[[1885년|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86년]] 사노비의 세습을 폐지하였다.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이해에 개교하였다. 1887년 경복궁 내에 전등이 가설되었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1893년 고종은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고, 영국인 대위 콜웰(William H. Callwell)과 하사관 커티스(James Curtis)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강화도에 최초의 근대적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했다. 통제영학당은 사관생도 50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여, 영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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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rtrait of Gojong 01.jpg|섬네일|왼쪽|200px|고종 황제의 어진]]
[[파일:고종.JPG|섬네일|[[선글라스]]를 쓰고있는 고종]]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제 1대제1대 [[황제]] '광무제'로 즉위하였다.
 
{{인용문2|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고조선)|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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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파일:Hwankudan.JPG|섬네일|208x208px|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대체글=]]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갑신정변을 주도한 일파 중 한명)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ref name="교수신문 편집국">{{뉴스 인용 |url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293|제목=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가 꿈꾼 ‘공화제’는 무엇인가|출판사=교수신문|날짜=2018-11-26}} '고종이 입헌군주제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 등에 관한 학술토론.</ref>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9년]]에는 이미 [[방콕]], [[교토]] 등에 다니고 있던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파일:Imperial banner of Korea.svg|섬네일|266x266px|고종 황제의 깃발인 《대한황제폐하몸기》]]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ref name="고종시대" /><ref name="명성황후" />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 광무개혁 ====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기치 하에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제|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여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증강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반대하였기 때문에 고종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열리는 [[1900년 만국 박람회|만국박람회]]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울릉도]]와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켰다.
 
[[1902년]]에는 [[간도]]에 간도시찰원을,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였다.
 
행정개혁은 [[지계아문|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1901년]]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였다.
 
===== 대원군 내외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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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죽었다사망하였다. 이를공식적인 놓고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심장마비 사인이라는이지만 자연사독살되었을 설과가능성이 자살설,끊임없이 그날제기되었다. 식혜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그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사실 무근이라는 반론도 있다.
 
{{인용문|고종황제가 [[의민태자|이 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1)을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의민태자|왕세자]]의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한일합방|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한편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독살설을 불신했지만 궁궐에 출입하던 인사들을 만나면서 독살설 쪽으로 심증을 굳히게 된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이는 [[김규식]]의 편지서신과 함께 [[3·1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고종 독살설 ====
{{참고|고종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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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하 당일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갑자기 뭔가를 마시다가 쓰러졌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ref name="yun1">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96페이지</ref>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yun1"/>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인용문|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br /><br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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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ref name="yun1" /> 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말해주었다고 했다.<ref name="yun1"/> 고 했다.
 
한편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이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수뇌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1919년]]에 개최되는 [[파리 강화회담|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합병의 부당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데라우치 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고종으로 하여금 1905년의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여 독살하였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와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와 같은 관료들에게 고종 독살에 대한 풍문을 묻기도 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7/2009022701131.html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2009년 2월 28일 [[조선일보]]</ref>
 
{{인용문|"(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br>
 
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i>1919년 10월 26일}}<br />
 
== 이문용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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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함녕전]]
|}
|}[[파일:대한제국Imperial 황실family 가족사진of Korea 02.JPGjpg|대체글=|섬네일|오른쪽278x278픽셀|왼쪽부터 의친왕영친왕, 순종, 영친왕고종, 순종비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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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 연표 ==
 
* [[1852년]] 9월 8일 :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부대부인|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863년]] (12세) : 음력 12월, [[조선 문조|익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26대 국왕으로 즉위.
* [[1865년]] (14세) : [[경복궁 중건]]을 시작함(~1868년).
* [[1866년]] (15세) : [[민치록]]의 딸과 혼인([[명성황후]]). [[병인박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발생.
* [[1868년]] (17세) :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오페르트]]가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침.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 [[1871년]] (20세) : [[제너럴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군이 강화도를 침범. ([[신미양요]])
* [[1873년]] (22세) : [[흥선대원군]]이 실각되고 친정을 시작.
* [[1875년]] (24세) : 일본 [[운요호]]가 [[강화도]]를 공격. ([[운요호 사건]])
* [[1876년]] (25세) :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 [[부산광역시|부산]], [[원산시|원산]], [[인천광역시|인천]]이 차례로 개항됨. [[부산항]] 개항. 일본에 1차 [[수신사]]를 파견.
* [[1880년]] (29세) : 개혁기구로 [[통리기무아문]] 설치. [[원산항|원산 개항]]. 일본에 2차 수신사를 파견.
* [[1881년]] (30세) : 신식군대인 [[별기군]] 창설
* [[1882년]] (31세) : 4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6월, [[임오군란]] 발생. 7월, [[제물포 조약]] 체결. 8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 [[1883년]] (32세) : [[인천항]] 개항. [[박문국]]과 전환국, 기기창을 설립. 최초의 사립학교인 [[원산학사]] 설립.
* [[1884년]] (33세) : [[갑신정변]] 발발.
* [[1885년]] (34세) : 영국이 [[거문도 사건|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함(~1887년).
* [[1886년]] (35세) : 노비의 신분 세습을 폐지.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설립되고 [[이화학당]] 설립.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포교를 허용.
* [[1887년]] (36세) : 경복궁 내에 전등이 설치됨.
* [[1889년]] (38세) : [[방곡령|방곡령 사건]]이 일어남.
* [[1894년]] (43세) : [[동학 농민 운동|동학농민운동]], [[청일 전쟁|청일전쟁]],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갑오개혁]] 등의 사건이 발생.
* [[1895년]] (44세) : 2월, [[교육조서|교육입국조서]] 발표, 9월, [[김홍집 내각|제3차 김홍집 내각]] 수립. 10월 8일, [[을미사변|명성황후 암살 사건]] 발생, [[단발령]]에 반발하여 [[을미의병|의병들이 봉기]].
* [[1896년]] (45세) :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 친러내각이 수립. 전국의 행정구역을 [[이십삼부|23부]]에서 [[십삼도|13도]]로 변경.
* [[1897년]] (46세) :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제정.
* [[1898년]] (47세) : 어머니 [[여흥부대부인]]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사망. 독립협회를 해산시킴. [[전화]]가 개통됨.
* [[1899년]] (48세) : [[대한국 국제]] 선포, [[경인선]]이 개통.
* [[1900년]] (49세) : [[울릉도]],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
* [[1904년]] (53세) : 2월, [[러일 전쟁|러일전쟁]] 발발, 대외중립선언. [[한일의정서]] 체결. 8월, [[제1차 한일 협약|제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 정치|고문정치]] 시작.
* [[1905년]] (54세) : [[경부선]] 개통. 11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 을사의병이 일어남.
* [[1907년]] (56세) : 4월, [[헤이그 특사 사건|헤이그에 특사 파견]]. 7월 20일, [[고종 양위 사건|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해산|군대가 해산]]됨.
* [[1910년]] (59세) :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 상실.
* [[1919년]] 1월 21일 사망.
 
== 연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