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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고 [[전라남도]] [[고흥군|고흥]] 출생이다. 호는 남촌(南村)이다.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그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공수특전여단장을 거쳐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였다.
 
5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19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1934년)|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세동도 세월이 가며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았고 급기야 전두환은 '장세동이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말을 안듣는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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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활동 ===
1936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서울]]로 유학하여 [[성동공업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2월 23일 육사 졸업 후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북극성회(하나회의 전신)에 참여하였다.
 
=== 군 복무 ===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보병사단 소대장 등을 거쳐 대위 진급 후 제1공수특전단에서 팀장(중대장)으로도 복무하였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1966년에는 4월 19일과 4월 20일에 퀴논 북쪽 24&nbsp;km 탄광 지역에서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ref>"중대장 부상하자 치열한 육박전", 동아일보 1966년 05월 03일자 6면, 정치면</ref>
 
1965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1966년에는 4월 19일과 4월 20일에 퀴논 북쪽 24&nbsp;km 탄광 지역에서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ref>"중대장 부상하자 치열한 육박전", 동아일보 1966년 05월 03일자 6면, 정치면</ref>
1967년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 작전장교가 되었다. 그후 군 감찰관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는데, 이로써 월남 파병을 두 번 가게 된 셈이 되었다. 이때 역시 베트남에 파병 중이던 [[전두환]]을 만나서 그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고 장세동도 전두환의 리더쉽에 이끌려서 그의 충복이 되었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에 있다가 귀국, [[육군본부]]의 여러 보직을 거쳐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의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으로 있다가 1977년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67년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 작전장교가 되었다. 그후 군 감찰관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는데, 이로써 월남 파병을 두 번 가게 된 셈이 되었다. 이때 역시 베트남에 파병 중이던 [[전두환]]을 만나서 그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고, 장세동도 전두환의 리더쉽에 이끌려서 그의 충복이 되었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에 있다가 귀국, [[육군본부]]의 여러 보직을 거쳐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의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으로 있다가, 1977년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충성심에서나, 두뇌에서나, [[전두환]] 최고의 충복으로 평가받았으며,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다. 이때 그는 장태완 등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한다.
 
그는 충성심에서나, 두뇌에서나, [[전두환]] 최고의 충복으로 평가받았으며,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다. 이때 그는 장태완 등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한다. 훗날 1996년의 재판에서 그는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에, "나는 탱크 한 대 당 72발 씩의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 했다. 1980년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해서는 그해 5월의 [[5·17 비상계엄]]에도 관여하였다. 그 후 육군 준장으로 진급 제3공수특전여단장 보직 중 1981년 7월 제5대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 정치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