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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ss protest in Cheonggye Plaza 01.jpg|섬네일|left|[[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6월 항쟁]] 이후 최다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시작되었으나, 취임 초부터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에 휩싸였지만, 임기 초반기였던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여러 나라와의 외교와 창조경제 및 수서발고속철도 설치 등으로 국정운영을 이끌어나가 지지율도 안정적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박근혜]]가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취임 초부터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출범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임기 초반기였던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여러 나라와의 외교와 창조경제 및 수서발고속철도 설치 등으로 국정운영을 이끌어나갔고 지지율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임기 초에 [[윤창중|윤창중 성추행 의혹]]과 [[김학의|김학의 성접대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지율이 잠깐 하락세를 걸었으나 이후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했다. 하지만 2013년 말에 철도노조 파업 당시의 민영화 논쟁 등으로 잠시 지지율이 잠깐 하락하기도 했으나, 새해 국정운영 계획 발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으로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했다. 하지만 2014년에 터진 세월호 참사 때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어서 지지율이 계속 하락했다. 하지만 이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고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면서 이후 인천 아시안 게임 개최와 교황 방한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다시 상승했으며 이후에도 사회인프라 확충, 헌법재판소를 통한 통합진보당 해산 등으로 국정운영을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까지 불거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다시 지지도가 하락했으며, 이후 다시 위기에 빠졌으나 여러 나라와의 외교와 대북강경책 등으로 계속 안정적으로 국정운영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2015년 4월에 터진 [[경남기업 정치권 금품 제공 의혹]]으로 인해서 다시 지지율이 하락했으며, 2015년 6월에 터진 [[메르스 사태]]에서도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계속해서 지지율이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하였으며 연이어 [[2015년 재보궐선거]]에서도 승리를 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에 반대적인 정권운영을 펼쳤다. 이는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에 따라 북한과의 마찰이 다시 벌어져서 2015년 DMZ 목함지뢰 폭발사건과 서부전선 포격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에 박근혜 정부는 대북확성기 방송도 재개를 했다. 그 이후에는 노동개혁과 4대 개혁법안 추진, 국정교과서 추진, 한일 위안부 합의, 원샷법, 개성공단 중단 등으로 계속 국정운영을 펼쳤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사회적 비판과 갈등을 겪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패배하고 여소야대 국회가 다시금 등장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이후에 [[한진해운|한진해운 사태]],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 관제시위 의혹]], [[우병우|우병우 의혹]], [[THAAD|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 등으로 지지율에 큰 진통을 겪었다. 그래도 2016년 중반기까지는 중동외교와 김해공항 확장, 성과연봉제, 사드 배치 등의 국정운영으로 지지율을 약간 정도 유지했다. 하지만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최순실 등의 민간인이 국정을 농단]]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박근혜에 대한 퇴진 운동]]이 거세지자,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그 다음해인 2017년 3월 10일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에서 국회의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여 박근혜가 파면되면서 박근혜 정부는 종료되었다. 박근혜는 지금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지금은 서울구치소에 있다.
 
그러나 임기 초에 [[윤창중|윤창중 성추행 의혹]]과 [[김학의|김학의 성접대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지율이 잠깐 하락세를 걸었으나, 이후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했다.
 
하지만 2013년 말에 철도 노조 파업 당시~ 민영화 논쟁 등으로 잠시 지지율이 잠깐 하락하기도 했으나, 새해 국정운영 계획 발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으로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했지만, 2014년에 터진 세월호 참사 때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어서 지지율이 계속 하락한 이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고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면서 이후 인천 아시안 게임 개최와 교황 방한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다시 상승했으며 이후에도 사회인프라 확충, 헌법재판소를 통한 통합진보당 해산 등으로 국정운영을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까지 불거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다시 지지도가 하락했으며, 이후 다시 위기에 빠졌으나 여러 나라와의 외교와 대북강경책 등으로 계속 안정적으로 국정운영을 이끌어 나갔으나, 2015년 4월에 터진 [[경남기업 정치권 금품 제공 의혹]]으로 인해서 다시 지지율이 하락했으며, 2015년 6월에 터진 [[메르스 사태]]에서도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계속해서 지지율이 하락했으나 이후에는 안정적인 지지율을 회복하였으며 연이어 [[2015년 재보궐선거]]에서도 승리를 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에 반대적인 정권운영을 펼쳤다.
 
이는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에 따라 북한과의 마찰이 다시 벌어져서 2015년 DMZ 목함지뢰 폭발사건과 서부전선 포격사건이 일어났자, 이에 대북확성기 방송도 재개를 했다.
 
그 이후에는 노동개혁과 4대 개혁법안 추진, 국정교과서 추진, 한일 위안부 합의, 원샷법, 개성공단 중단 등으로 계속 국정운영을 펼쳤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사회적 비판과 갈등을 겪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패배하고 여소야대 국회가 다시금 등장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이후에 [[한진해운|한진해운 사태]],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 관제시위 의혹]], [[우병우|우병우 의혹]], [[THAAD|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 등으로 지지율에 큰 진통을 겪었다. 그래도 2016년 중반기까지는 중동외교와 김해공항 확장, 성과연봉제, 사드 배치 등의 국정운영으로 지지율을 약간 정도 유지했지만,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최순실 등의 민간인이 국정을 농단]]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박근혜에 대한 퇴진 운동]]이 거세지자,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그 다음해인 2017년 3월 10일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에서 국회의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여 박근혜가 파면되면서 박근혜 정부는 종료되었다. 박근혜는 지금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지금은 서울구치소에 있다.
 
==== 문재인 정부(임기: 2017년~20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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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의 확대 ===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하여, 자유로운 학문과 교육이 가능해졌다. 미군정기의 일제의 식민 교육을 대신하여 미국식 민주주의와 6-3-3학제가 들어왔다. 그러나들어왔으나, 피폐해진 한국 사회의 현실과 민족 교육 이념을 무시한 채, 양적 확대에만 치중하여 미군정의 교육 정책은 한국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교육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른 교육열이 높아져갔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이 시작되면서 교육 인구가 늘어갔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1960년대 경제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교육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른 교육열이 높아져갔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이 시작되면서 교육 인구가 늘어갔고, 이를 바탕으로한 1960년대 경제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으나, 지나친 교육열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좋은 학벌을 가지기 위한 파행적인 학교 수업과 과외 열풍 등 특히 [[무즙 파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완화하기 위하여 1970년대 중학교, 고등학교의 무시험 선발 제도가 지역별로 확산되었으며, 1980년대 전반에는 [[신군부]]의 유화정책으로 과외금지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로 교육은 양적으로 더욱 확대되었는데,확대: 고등교육이 확대되고확대되었고, 이를 대중화하기 위한 통신대학이나 산업대학 등 다양한 형태의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사교육에 대한 투자는 급증하고 있는데급증하는데, 공교육에 대한 투자는 이에 전혀 못 미치고, 사회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못한다.
 
=== 언론 활동의 발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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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언론은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였다.거듭하여, 신문이나 잡지의 발행이 크게 늘어났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방송국도 생겨났다. 최근에는 유선 방송이 보급되고, IPTV가 생겨났으며,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도 점차 보편화되었다.
 
언론은 때때로 정권의 통제를 받기도 했는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신문에 대한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는 언론을 통폐합하고 비판적 언론인들을 구속하거나 해임시키는 등 탄압에 나서기도 하였다.
 
특히 [[10월 유신|유신]]에 대해 비판을 한 언론인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언론 자유 수호 투쟁]]을 벌였으나, 대부분 해직되거나 탄압을 받았다.
 
최근에는 유선 방송이 보급되고, IPTV가 생겨났으며,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도 점차 보편화되었다. 언론은 때때로 정권의 통제를 받기도 했는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신문에 대한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는 언론을 통폐합하고 비판적 언론인들을 구속하거나 해임시키는 등 탄압에 나서기도 하였다.
[[전두환]]이 집권한 제5공화국 시절인 1980년 군부정권에서는 [[언론통폐합]] 조치를 시행하였고, [[언론 지침]]을 통해 보도 내용까지 강제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특히 [[10월 유신|유신]]에 대해 비판을 한 언론인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언론 자유 수호 투쟁]]을 벌였으나, 대부분 해직되거나 탄압을 받았다. [[전두환]]이 집권한 제5공화국 시절인 1980년 군부정권에서는 [[언론통폐합]] 조치를 시행하였고, [[언론 지침]]을 통해 보도 내용까지 강제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은 기반을 닦고나서 국민에 대한 유화책을 펼쳤다. 그에 따라 통행금지 해제나 해외 여행 자유화, 교복 자율화, 과외 금지 등이 시행되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고, [[1988년]]에는 [[1988년 하계 올림픽|서울 올림픽 게임]]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2002년]]에는 [[2002년 FIFA 월드컵|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였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