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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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적(戸籍)」, 「계장(計帳)」, 「반전수수(班田収授)」 등의 단어는 다이호 율령에서 처음 보이는 용어로 그 이전의 문서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 개신의 조에서 「처음으로 경사(京師)를 수리하였다」고 했지만 실제 야마토 왕권이 도성제(都城制)를 도입한 것은 [[694년]] 후지와라쿄가 최초였다.
* 연호가 띄엄띄엄 기록되었거나 아예 없었던 시대도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연호 제도가 정착된 것은 다이호 원년으로 그때까지 일본에 연호 제도라는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의심스럽다.
* 다이카 2년(646년)에 내려진 박장령에 따라 최초로 [[화장]]된 군주는 지토 천황이 최초이며(남편인 덴무 천황과 합장된 것도 덴무 천황이 최초이다), 조를 반포한 고토쿠 오키미 본인조차 박장령을 따르지 않았다(고토쿠 오키미는 654년, 지토 천황은 703년에 서거).
* 소가노 에미시, 이루카 부자가 죽은 뒤에도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개신 정권에서 우대신을 맡는 등 소가 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카 4년에 이시카와마로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하긴 했지만 이 또한 다이카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가 씨의 세력권이었던 아스카를 떠나서 나니와 궁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아스카로 돌아왔으며, 덴지 오키미의 시대에야 아스카에서 오미로 조정을 옮겼고, 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아마노 미코는 다시 조정을 아스카로 돌렸다. 일본 황실이 아스카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694년]]의 후지와라쿄 천도 때부터였으며, 701년에 [[다이호 율령]]이 반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