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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3세]]의 장자로, 노르만 정복 이래 잉글랜드 최초의 국민적인 왕이라 불린다. 왕세자 시절에 [[가스코뉴]]와 [[아일랜드]]의 영주로서 활약했으며, [[1258년]]∼[[1265년]]의 내란에는 부왕을 도왔다. [[1265년]] [[시몽 드 몽포르]]를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1271년]] [[십자군]]에 참가, 부왕의 사후 원정 중에 왕으로 선출되어, [[1274년]]에 귀국하여 대관하였다.
 
아버지 헨리 3세 때부터 있어 온 외국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을 썼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 등 부동산의 양도 및 상속에 관한 중요한 법률을 만들어 '영국의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 불리었다.
 
재판 행정 제도를 확립하고 일련의 제정법을 발포, 봉건사회의 질서 유지에 노력하였다. 또 산업에 주력하고 1285년 상인법을 발령, 양모와 가스코뉴의 술 생산을 장려하였다.그는 프랑스 왕에게 신종하여 대륙에 있어서 [[나바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문제, [[아라곤 왕국|아라곤]] 왕 알폰소와 교황·프랑스 왕 [[필리프 단려왕]]과의 조정(1291)에 활약이 컸다. 1295년 성직자와 귀족, 각주에서 2명의 기사 및 도시의 대표를 모아 '모범 의회'를 열어 영국 의회의 기초를 쌓았다. 말년에 단려왕의 [[가스코뉴]], [[플랑드르]] 공격을 받아 1303년 파리 협정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또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조달 때문에 국내의 반란을 유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