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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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나라 사행길과 목화 반입 ===
==== 원나라 왕환 ====
1363년에[[1363년]]에 좌정언으로 재직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사신으로 건너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때 [[연경]]에 도착한 그는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 등에게 패하였다.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ref name="chung149"/>'라는 견해도 있다.